경학사는 1911년 신민회의 간부들이 만주 삼원보에 이주하여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국내 비밀 항일운동 단체인 신민회는 제2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만주 이주 계획을 진행하였다. 이시영, 이동녕 등 전국 팔도의 민족지도자들과 가족 300여 명은 삼원보로 이주해 경학사를 조직하였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인재 양성을 중요시하였다. 부민단(1912), 한족회(1919)가 경학사의 이념과 사업을 계승하였다. 한족회는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였다.
신민회 간부들은 각 도에 책임자를 선정, 군자금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그 해 여름 신민회 간부 이회영(李會榮)을 서간도로 파견해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게 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지방(鄒家街地方)을 선정하였다.
신민회의 군자금조달사업은 이른바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寺內總督暗殺未遂事件)으로 차질이 빚어졌으나, 독립운동지도자들의 만주 이주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이시영(李始榮)의 다섯 형제와 이상룡(李相龍) · 김창환(金昌煥) · 이동녕(李東寧) · 여준(呂準) · 이탁(李沰) 등 각 도의 대표적 인사 100여 명이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하여 삼원보를 중심으로 토지를 구입,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1년 4월 그 곳에 모인 민족지도자들은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고,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을 의결하였다.
①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②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③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④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⑤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한다.
이 결의에 따라 사장에 이철영(李哲榮), 부사장에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金東三) · 이원일(李源一), 학무에 이광(李光) · 여준, 재무에 이휘림(李彙淋) · 김자순(金子淳), 조사에 황만영(黃萬榮) · 박건(朴健), 조직에 주진수(朱鎭洙) · 김창무(金昌武), 외무에 송덕규(宋德奎) · 정선백(鄭善佰) 등이 선임되었다.
설립 목적은 병농제(兵農制)를 채택하여 근로정신에 입각, 학술을 연마하고 구국 인재를 양성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 두었다. 그리하여 먼저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 구국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경학사는 무엇보다 인재 양성을 중요시하여 1912년 3월 이회영이 전에 구입하여 놓은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학교를 세우고, 유하현 대고산에도 학교를 신축하여 신흥학교의 제3기지를 설치하는 등 교육사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사업이 나날이 발전, 국내에서 많은 애국 청년들이 만주로 건너와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1911년 뜻하지 않은 서리가 내림으로써 그 동안 가꾸어 놓았던 농작물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1912년에도 대흉년을 만나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많은 사람이 풍토병으로 고생하였다. 이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운영난에 부닥쳐 사실상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어 경학사의 이념과 사업을 계승함으로써 그 명맥이 이어졌다.
부민단은 1919년 3 · 1운동 직후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되었다. 이 한족회는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하고, 신흥강습소의 후신인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사관을 양성함으로써, 경학사의 당초 취지는 이때에 와서야 완성을 보게 되었다. → 부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