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양의종(梁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아버지는 양시영(梁時英)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儒林)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 조직 운동에 가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기간에 일제가 조선에게 삼림·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가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방해 책동으로 해산되자,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고 지방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7월 18일 영국인 기자 베델[Ernest Thomas Bethell, 배설(裵說)]과 제휴, 국한문 혼용체의 일간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그때 신문사의 총무 겸 주필로 근무하면서, 다음 해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라는 제호의 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와 이토[伊藤博文]를 공격하고 배일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신문 사설을 썼다. 또한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즉각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코리아 데일리 뉴스』지에 실어 전세계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사들이 일제의 「신문지법」에 의해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는 등의 제약을 받고 있을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형식상 사장이 외국인이어서 법의 저촉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매일신보』는 모든 한말 국권 회복 운동의 대변지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 통감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양기탁은 '국채보상금횡령(國債報償金橫領)'이라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 그 뒤 사장 베델이 공소 사실의 허위 조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자 무죄로 출감하였다.
1907년 4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회영(李會榮)·이동휘·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개최된 신민회 전국 간부 회의에서는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1910년 8월 자신이 직접 그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이동녕과 이회영을 만주로 보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명근(安明根)에 의한 군자금 모금 사건이 일어나자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또, 그해 9월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 암살음모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언도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되어 4년간 복역하다가 1915년 2월에 석방되었다. 이듬해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노력하다가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국으로 압송되어 2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유근(柳瑾)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 해 봄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創敎)하여 교리를 선포하였는데, 표면으로는 종교 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1년 미국 의원단 36명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 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가 어머니의 별세로 가출옥되었다. 이때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3년 만주에서 편강렬(片康烈)·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국내의 친일파 암살 및 관공서 시설 파괴 등을 지휘하였다.
또, 1924년 11월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과 의성단·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광정단(匡正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를 공격하였다. 1926년 4월 주진수(朱鎭洙)·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 등과 정의부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국무령(國務領) 이상룡(李相龍)의 사임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였으나, 1934년 의정원 회의에서 법무 담당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 2월 2일 가흥(嘉興)에서 국무원이 개설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 해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해 의열단·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의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고 이를 통합한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으로 개명]이 조직되자,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 등과 이에 가담하여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길당암(吉堂庵)에서 선도(仙道)를 닦다가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