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회 ()

목차
관련 정보
근대사
단체
1919년 서간도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단체
설립 시기
1919년 3월
설립자
이탁|김동삼|양규열|이진산|윤기섭 외
설립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발간지
한족신보(韓族新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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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족회는 1919년 서간도(西間島)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서간도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이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3 · 1운동으로 변화된 시대 상황에 따라 교육회(敎育會), 자신계(自新契)와 통합하여 확대, 개편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기반으로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군비 확충과 군사 훈련에 힘썼다.

목차
정의
1919년 서간도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변천 및 현황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여 무장항일전을 준비해온 서간도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이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3 · 1운동으로 변화된 시대상황에 따라 교육회, 자신계와 통합하여 1919년 3월 13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총장(總長)에 이탁(李鐸), 서무사장(庶務司長) 김동삼(金東三), 외무사장(外務司長) 양규열(梁圭烈), 법무사장(法務司長) [이진산(李震山)], 검찰사장(檢察司長) 최명수(崔明洙), 학무사장(學務司長) 윤기섭(尹琦燮), 재무사장(財務司長) 안동원(安東源), 상무사장(商務司長) 김정제(金定濟), 내무사장(內務司長) 곽문(郭文)으로 구성되었다.

삼원보에 근거를 두고 자치를 주 활동으로 삼으면서 시사연구부를 설치하여 시세를 연구케 하였다. 관할구역은 유하, 화전(樺甸), 반석(磐石), 통화(通化), 환인(桓仁), 흥경(興京) 등 서간도 일대였다. 기관지로 이시열(李時說), 허영백(許英伯), 오치무(吳致武) 등이 집필한 『한족신보(韓族新報)』을 간행하였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요원을 파견하고, 독립군 모집에 나서면서 군사 활동에 착수하였다. 군사 활동의 기반에는 신흥학교가 있었다. 신흥학교는 3 · 1운동 이후 확대되어 3곳에 본교와 분교를 세우고, 3개의 학도대(學徒隊)를 설립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3 · 1운동 당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단원은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군사과를 졸업한 청년은 약 3,000명이었다. 이들로 지방군 1개 여단을 조직하여 유사시에 대기하고 있었다.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모든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할 중앙정부의 건립을 목표로 산하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수립되자, 그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며,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청천(李靑天)의 지휘 아래 의용대를 안도현(安圖縣)에 보내는 한편 홍범도(洪範圖) 등과도 연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민영,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과 민족수난』 (선인, 2016)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 · 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5: 독립군전투사(상)』(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3(탐구당, 1967)
집필자
윤상원(전북대학교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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