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렬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 연락 요원으로 독립선언서를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울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인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비밀결사 삼성구락부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된 뒤,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 연락 요원으로 1919년 2월 28일 서울 천도교 교구당에서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5,000장을 전해 받아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3월 5일 서울 시내에서 전개되었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뒤 고향인 전라북도 옥구군으로 귀향하였다. 1919년 3월 25일 자택에서 진장권(陳壯權), 김석종(金錫宗), 황봉규(黃琫奎), 최한례(崔翰澧) 등과 함께 3월 29일 임피시장에서 만세운동할 것을 계획하였다. 3월 28일 진장권의 집에서 태극기 200매를 제작하였다. 3월 29일에는 김석종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독립만세시위 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4년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인 삼성구락부(三省具樂部)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