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묵암(默菴) · 옥파(沃坡), 도호(道號)는 천연자(天然子).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교환(李敎煥)이다.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894년에는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2세교육에 힘썼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그 막후에서 민권의식과 민권사상 고취에 노력했으며,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해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 청년애국회에 관여하였다. 개화사상을 보급시켰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의 신서적을 통해 전래적인 실학에서의 주상적(主商的)인 해외교류의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신문사업을 실학운동의 재현으로 인식 · 이해하였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이 창간한 『경성신문』에 논설을 쓴 시작한 경험을 살려 개화사상가 유영석(柳永錫) · 장효근(張孝根) · 이종면(李鍾冕) · 이종문(李鍾文) 등 이문사(以文社) 관계인의 권유와 추대로 그해 8월 『제국신문』을 순 한글로 창간하였다. 1910년까지 10여 년간 사장 겸 기자로서 언론계에서 개화와 계몽 · 구국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황성신문』 · 『만세보』 ·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 참여하다가 1919년에는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05년 12월 홍산(鴻山)의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손병희(孫秉熙)와는 『제국신문』 창간 당시부터 교분이 있었다. 천도교에 입교한 뒤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으로 월보를 발행, 집필하면서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의 사장으로 천도교관계 각종 서적을 간행하였다. 1906년 9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되자, 1907년 그 후신으로 조직된 대한협회의 회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항하였다. 1912년 천도교의 풍족한 재정과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운동, 1904년의 갑진개화신생활운동을 1914년 갑인년에 재현하는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2월 27일 밤 장효근 · 김홍규(金弘奎) · 신영구(申永求) 등과 협력,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독립선언문 3만 5,000장을 인쇄해 인종식(印宗植) 간사를 통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3 · 1운동으로 3년 복역 중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1922년 3월 1일 또다시 보성사팀과 같이 천도교 교인 등의 단독으로 제2의 3 · 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지조를 지키다가 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