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제국신문 기자 겸 사장, 보성사 사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등을 역임한 언론인·천도교인·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이 창간한 『경성신문』에 논설을 쓴 시작한 경험을 살려 개화사상가 유영석(柳永錫) · 장효근(張孝根) · 이종면(李鍾冕) · 이종문(李鍾文) 등 이문사(以文社) 관계인의 권유와 추대로 그해 8월 『제국신문』을 순 한글로 창간하였다. 1910년까지 10여 년간 사장 겸 기자로서 언론계에서 개화와 계몽 · 구국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황성신문』 · 『만세보』 ·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 참여하다가 1919년에는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05년 12월 홍산(鴻山)의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손병희(孫秉熙)와는 『제국신문』 창간 당시부터 교분이 있었다. 천도교에 입교한 뒤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으로 월보를 발행, 집필하면서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의 사장으로 천도교관계 각종 서적을 간행하였다. 1906년 9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되자, 1907년 그 후신으로 조직된 대한협회의 회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항하였다. 1912년 천도교의 풍족한 재정과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운동, 1904년의 갑진개화신생활운동을 1914년 갑인년에 재현하는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2월 27일 밤 장효근 · 김홍규(金弘奎) · 신영구(申永求) 등과 협력,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독립선언문 3만 5,000장을 인쇄해 인종식(印宗植) 간사를 통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3 · 1운동으로 3년 복역 중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1922년 3월 1일 또다시 보성사팀과 같이 천도교 교인 등의 단독으로 제2의 3 · 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지조를 지키다가 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3·1운동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 「개화기의 인물과 그 사상: 묵암비망록을 중심으로」(이현희, 『한국사상』17, 1980)
주석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