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 5일 사장 남궁 억(南宮檍), 총무원 나수연(羅壽淵) 등이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 아래 지금의 서울 광화문에서 창간하였다. 남궁 억은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를 신문사상 최초로 채택해서 운영하였다.
500고(股: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각 내는 밑천)의 고표를 발행하여 자본금 5,000원을 목표로 하였으나 반수의 모금으로 발족되었다. 체재는 소형판(23×31㎝) 3단제로 본문은 4호 활자를 사용하였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나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 식자층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면의 기사배치는 대한제국시대의 다른 신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논설·별보(別報)·관보·잡보(雜報)·외보·광고 등으로 구성하였으며, 1899년 11월 13일자부터는 지면 크기를 확대하여 34.5×25.2㎝의 4면 4단제를 채용하고 기서(寄書)·고사사조(故事詞藻)·습유란(拾遺欄: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등을 신설하였다.
1900년 1월 5일자 신문부터는 외신을 게재하는 ‘전보’기사란에 “한성 루터 전특체(電特遞)”라고 부기하고 외국 뉴스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날짜 사고(社告)의 “외국 사항에 전보를 직접(直接)치 못하여 보도에 만시(晩時)됨을 한하옵더니 현(現)에 영경(英京) 루터 전보를 정약통접(訂約通接)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영국 로이터통신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외신을 공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문의 초기 주필로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이 활약하였으며 얼마 뒤 장지연(張志淵)도 합류하였다. 창간 때부터 1902년 8월까지 만 4년간 사장직을 맡은 남궁 억은 재임중 두번이나 구속되었다. 1902년 8월 31일에는 2대 사장으로 장지연이 선출되었다.
1904년 6월 17일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황무지개척권을 주한 일본공사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요구해오자, 이 신문은 그 부당성을 여러 차례 사설로써 보도하여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민중대회의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상세히 보도하여 배일(排日)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2월 24일 이 신문은 한일의정서의 조인 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 명령으로 기사를 삭제당하여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함으로써 이른바 ‘벽돌신문’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1905년 11월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24일 장지연이 석방되고 발행정지도 동시에 해제되었으나 장기정간으로 재정난이 악화되어 2월 12일에야 겨우 속간할 수가 있었다.
2월 17일자에는 사장 장지연, 부사장 김상연(金祥演), 회계 김시영(金始榮) 등이 사임하고 새로운 운영진이 사원총회에서 선임되었는데, 이 때 남궁 훈(南宮薰)이 3대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총무에 성낙영(成樂英), 회계에 김재완(金在完)을 선임하였다.
그 뒤 1907년 5월 18일 총회에서 사장에 김상천(金相天), 총무에 김재완이 선출되었고, 그해 9월 17일 총회에서 사장에 유근이 선출되었다. 1910년 6월 12일부터는 편집 겸 발행인이 성선경(成善慶)으로 바뀌었다.
이 신문은 합자회사 형식으로 경영되었으나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하고 독자들이 구독료를 잘 내지 않아 ‘사고(社告)’를 통하여 수차에 걸쳐 재정의 궁핍함을 밝혔다. 특히 1903년 2월 5일자 신문에 논설로써 신문발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 날짜 ‘사고(社告)’에 발행부수 3,000여 장에 구독료 및 광고료 수입이 매월 1,500여 원이고, 지출은 용지대·잉크값 등이 830여 원으로 흑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독료 미수금이 7,000여 원에 이르고 있고 용지 및 잉크값 등이 2,000여 원이나 밀려 폐간지경에 있음을 밝히자, 각계의 뜻있는 사람들이 10원 이상 200원까지 성금을 보내 곧 속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문값은 제대로 걷히지 않아 경영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영난을 광고를 통해 많이 해소시키기도 했는데 1900년 이후부터는 전체 지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품광고로는 약품과 서적이 가장 많았으며, 비상품광고로는 사회의 어지러움을 반영하는 분실·개명·사기·경고 등의 광고건수가 많았다.
이렇듯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뀌어 8월 30일자부터 9월 14일(제3470호)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이 신문은 경술국치 전까지 ≪뎨국신문≫과 함께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