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은 1885년 고종 22년에 서울에 설립되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이 세운 최초의 학교로 기독교인 양성과 근대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성경,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등 서양식 교과목을 서양식 교육 방식으로 가르쳤다. 서양식 운동인 야구, 축구, 정구, 농구 등을 소개하고 토론회, 연설회 등도 장려하였다. 한글 활자로 성서를 인쇄하고, 배재학당 협성회보, 『매일신문』, 『천로역정』도 간행하였다. 구한말 교육구국운동,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하였던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배재중·고등학교이다.
미국의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설립한 근대적 사학(私學)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두 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스크랜튼(Scranton,W.B)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이겸라(李謙羅) · 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폴크 공사(公使)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아뢰었고, 동시에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 학교 간판)을 내려 주었다.
당대의 명필 정학교(丁學喬)에게 학교 간판을 쓰게 하고, 외무아문(外務衙門)의 김윤식(金允植)에게 이 간판을 하사하도록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종이 배재학당에 대해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개교의 사정을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모양으로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하나는 6월은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 버렸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에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이들의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그 일부가 채워졌다. 10월 6일인 지금은 재학생이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
이렇게 출발한 배재학당은 그후 날로 늘어가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큰 교사(校舍)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1887년에는 르네상스식 벽돌집이 미국민의 선물로 완성되었다.
이 학교는 대가(代價)를 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수 없음을 학생들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학생자조정책(學生自助政策)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1888년에 자조부(自助部)가 설치되어 학교 구내를 돌보고 지키는 일을 고학하는 학생들이 맡아 하였다.
그러기에 배재학당의 교육 목적은 기독교인 양성과 근대 국가의 인재를 배양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과 영어를 비롯하여 인문 · 사회 · 자연과학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길모어(Gilmore,G.W.)는 1892년에 배재학당을 포함한 미션 학교의 교육용구(敎育用具)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리와 역사 공부에 필요한 지도(地圖)와 괘도(掛圖)며, 물리와 화학의 실험기구며, 작은 망원경과 현미경 이외 기타 실험기구가 요청된다. …… 그리고 소규모의 천문대는 학생들의 흥미를 일으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교과목은 한문 · 영어 · 천문 · 지리 · 생리 · 수학 · 수공 · 성경 등이었는데, 영국인 비숍 여사는 1897년 배재학당의 규모와 교과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 · 도덕적 · 지적 영향을 미쳐 왔고, 또한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는 기관은 배재학당이다. …… 이에는 한문 고전(古典)과 셰필드(Sheffield)의 만국역사(萬國歷史)를 가르치는 한문-국문과가 있고, 소규모의 신학과(神學科)와 독법(讀法) · 문법 · 작문 · 철자법 · 역사 · 지리 · 수학 및 화학과 자연철학을 가르치는 영문과가 있다.”
이러한 교과목 외에도 배재학당에서는 체육시간에 서양식 운동인 야구 · 축구 · 정구 · 농구 등도 소개하였다. 또 특별활동 시간에는 연설회 · 토론회 등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교내 변론회(辯論會)를 조직하고 시국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마치 기성인들이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양상과도 같았다. 당시 『독립신문』에서는 배재학당의 연설 공부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원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이 있게 의논하며 중의를 ○아 일을 걸쳐 하는 학문들은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 배재학당 협성회(協成會)는 서재필(徐載弼)이 동교(同校)에서 개화운동의 한 방법으로 지리학을 강의하게 된 것을 기회로 이루어졌는데, 그 창립 목적은 첫째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을 기르고, 둘째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며, 셋째 서로 협조하여 학습과 선행을 이루며, 넷째 전국 동포를 계몽하자는 것이었다.
배재학당의 수업료는 매월 3량이었고, 학비가 없는 학생에게는 일자리를 주어 자신의 힘으로 벌게 하여 자립정신을 길러 주려고 하였다. 도강(都講: 학기말 시험)은 매년 2차로 정하고 성적 평가는 100점 만점으로 하였다. 공과점표(工課點票: 성적표)는 직접 학부형이나 보호자에게 보냈다. 그리고 배재학당에서는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福音)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에서나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기에 학당훈(學堂訓)으로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운 것도 성경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6∼28절)라는 예수의 교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후 이 당훈은 배재의 정신이요, 교육의 목표이며, 실천이고, 또 생활이 되었다.
구한말 배재학당의 문화활동을 보면, 1889년에는 중국에서 오래 선교하던 올링거(Ohlinger,F.)를 불러 활판소(活版所)를 관리하고 한글 활자를 주조하여 성서를 인쇄하였을 뿐 아니라 1897년에는 『조선 그리스도인의 회보』를, 1898년에는 『협성회보』(학생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또한 그 해에 일간신문으로 『매일신문』(학생의 기관지)을 발행하였고, 1892년에는 목각(木刻)으로 『천로역정(天路歷程)』을 발행하였는데, 주조 활자를 학당에서 만들기 전이었다.
또한 민족운동 측면에서도 배재는 구한말에 교육구국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고,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에는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굽히지 않고 용감히 항쟁하였으며, 그들이 한글(나라말과 나라글자)을 끝내 지켜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민족운동을 해외에까지 선전하였다.
이 같이 배재가 1885년에 정동(貞洞) 언덕에 자리잡고 신교육의 문을 열어 이 겨레의 암흑을 깨우치고 이 땅에 새로운 문화를 이룩하며 조국과 겨레 앞에 유위(有爲)한 인재를 길러 보낼 것을 약속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겨레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로, 우리 겨레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므로 배재의 역사는 곧 한국의 역사이며, 한국의 교육사요 한국의 문화사이다.
이러한 역사의 중요성을 느껴 1955년에는 배재학당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배재 칠십년사』를 발행하였으며, 1965년 6월 8일에는 창립(創立)된 지 80주년(週年)을 맞는 자랑스러운 날의 기념사업으로 도서관을 신축하고 『배재 팔십년사』를 개편 증보해서 발행하였으며, 1985년에는 『배재 100년사』를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