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

박흥식
박흥식
경제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비행기공업㈜사장, 화신백화점 사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 8월 6일
사망 연도
1994년 5월 10일
출생지
평안남도 용강
관련 사건
중일전쟁|일본군 국방헌금|비행기 헌납|경제재건촉진회
내용 요약

박흥식은 일제강점기 조선비행기공업㈜사장, 화신백화점 사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0년 2월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인쇄소를 설립했다. 1926년 경성에서 선일지물㈜을 설립하고 대표이사를 맡았다. 1931년 화신상회㈜를 설립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며 거금의 국방헌금을 기부했다. 1944년 전투기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해방 이후에는 화신산업㈜·흥한화학섬유㈜ 사장, 광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4년 사망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비행기공업㈜사장, 화신백화점 사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지역 유지로 군참사(郡參事)와 도참사(道參事)를 역임한 박제현(朴濟賢)과 김선(金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인 박제현은 서북학회에 가입하고 진명일어학교와 보신학교 경영에 관여할 정도로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1세 연상의 형 박창식은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투옥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1911년 12월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화신상회㈜ · 조선비행기공업㈜ · 화신백화점 사장 등을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화신산업㈜ · 흥한화학섬유㈜ 사장, 광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4년 5월 10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 부친이 타계한 이후 진남포상공학교에 진학했으나 중도에 포기했다. 1919년 2월 서북지역 제일의 무역항인 진남포를 중심으로 미곡무역상에 투신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급증하는 미곡 이출과 쌀값 폭등을 배경으로 거부를 축적했다. 이를 농지에 투자하여 용강 최대의 지주로 성장하는 한편 인쇄업과 지물업에 진출했다.

1920년 2월 평안남도 용강에서 자본금 5만원으로 선광인쇄소를 설립하였다. 1924년에 이르러 자본금 10만원의 선광인쇄지물(鮮光印刷紙物)㈜로 법인화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통신판매제를 도입했다. 같은 해 용강지역에 용강유치원을 설립해서 원장이 되었고, 1925년에는 용강농업학교를 설립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서선산업㈜ 대주주로 사장에 취임했다.

1926년 경성으로 올라와 그해 6월 지물도매업을 전문으로 하는 자본금 25만원의 선일지물(鮮一紙物)㈜을 설립하고 대표이사를 맡았다. 사업 당초에는 일본 왕자제지(王子製紙)㈜와 신문용지 특약점 교섭을 하였으나 무산되자 스웨덴, 캐나다 등 수입선을 다변화해서 일본산보다 저렴하게 대량의 지물을 확보했다. 영업 수완을 발휘하여 설립한지 1년 만에 전국 수백 개 서점과 인쇄소 등을 주요 거래처로 만들었다. 주1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주요 신문사를 고객으로 삼았다. 그 결과 1932년 선일지물의 거래처가 전국 1,000개소에 달했고 연간 지물류 판매액이 300만원에 달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1930년 12월 경성상공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31년 9월 신태화(申泰和)가 경영하며 금 · 은 잡화를 팔던 화신상회(和信商會)를 인수해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했다. 이 무렵 금 시세가 폭등하여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며, 1935년 화신㈜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32년에는 최남(崔楠)이 경영하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서 종로의 조선인 상권을 장악했다. 1933년 4월에는 조선물산장려회 준비위원을, 1934년 4월에는 이사를 맡았다. 같은 달에 조선중앙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해 6월 상담역에 선임되었다.

1934년 6월 중간도매상을 배제하는 연쇄점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유통업에 진출했다. 조선 전역에 1,021개소의 연쇄점을 개점하고 화신상회㈜가 자금과 상품을 제공하여 판매의 일원화를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식산은행장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에게 300만원을 차입하는 등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다. 연쇄점 사업이 순항하여 이를 토대로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원의 화신연쇄점㈜을 설립했다.

1935년 1월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소실되어 위기를 맞았지만 평소 친분이 깊었던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의 도움으로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대하여 백화점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거금 40만원을 들여 2년여의 공사 끝에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엘리베이터 4대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신축했다. 1935년 9월 자신이 소유한 토지와 건물 등의 부동산을 경영하는 자본금 200만원의 대동흥업(大同興業)㈜을 세웠으며, 다른 제조회사에도 투자해서 1935년 경성방적㈜ · 북선제지화학㈜ · 조선석유㈜에 이사로 참여했다.

1937년 주2이 발발하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며 거금의 주3을 기부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8월에는 주4에 일본정신을 발양하는 기원제를 올리기 위한 기원제거행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9월에는 경기도 애국기헌납발기회에 참석해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10월 강원도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조선양지(朝鮮洋紙)㈜ · 조선평안철도㈜ · 제주도흥업㈜ 이사로도 활동했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및 물가위원회 위원,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조선생명보험㈜ 이사로 위촉되었다. 1939년 2월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 7월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8월 배영동지회연맹 상담역, 11월부터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인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원을 기부했다.

중일전쟁 후 사업을 더 확장하여 1939년 2월 대동직물㈜을 설립해서 사장이 되었고, 4월에는 화신무역부를 개편하여 자본금 275만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2월에는 미쓰이물산㈜ 등과 합자하여 몽고 일대에 주5 재배 및 제조 판매를 목적으로 대동향연고빈공사(大同香煙股份公司)를 세웠다. 같은 해인 1939년 조선공작㈜과 남만방적㈜ 이사로도 활동했다.

1939년 4월 협성실업학교를 인수하여 이사장에 취임했고, 1940년 7월에는 광신(光新)상업학교로 개명했다. 1940년 5월 조선백화점조합 이사장, 6월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위원, 7월 기계화국방협회 조선지부 이사, 9월 조선부인 · 아동복원단상인조합 이사장, 10월 조선중등학교 제복제조업조합 이사 및 조선직물이입조합 감사를 맡았다. 같은 해인 1940년 11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참석해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그해 「사변 3주년과 새로운 각오」(『매일신보』1940.7.7.)와 「신정치체제와 근위(近衛)신내각에 대한 조선인 요망」(『삼천리』1940.9.)을 발표해서 총독부 시책에 부응했다. 그해 9월 조선총독이 주는 공로상을 받았고, 10월에는 일본제국교육협회장이 주는 공로상을 받았다.

1941년 전시통제의 영향으로 경영체제를 바꾸면서, 9월 화신무역㈜, 화신연쇄점㈜, 선일지물㈜을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원의 화신상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1년 1월 충청남도 부여에 신궁이 건설되자 신궁조영근로봉사단으로 참석했다. 같은 해인 1941년 조선무역협회 이사, 조선수출공업협회 이사를 맡았고,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8월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 준비위원 · 상임위원 · 경기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같은 해 9월 민규식(閔奎植) · 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비 20만원을 헌납했다.

1941년 조선섬유잡화도매㈜와 동양척식㈜ 이사로 활동하는 한편 「경제통제령과 아사(我社)의 대책」(『조광』1941.1.), 「재계인의 연두소감-익찬보조정비(翼贊步調整備)를」(『매일신보』1941.1.6.), 「지나사변과 나의 각오」(『신시대』1941.7.), 「사명완수에 매진」(『매일신보』1941.9.26.)이라는 글을 써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2년 조선권농㈜ · 동광생사㈜ · 조선해수흥업㈜ · 대흥무역㈜ · 조선공영㈜ · 경인기업㈜ · 조선영화제작㈜ 이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인 1942년 화신㈜과 화신상사㈜ 종업원 등에게서 국방헌금 3만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냈다. 그해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1942.2.),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이임에 즈음해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1942.5.30.), 「배알(拜謁)의 광영의 감읍」(『매일신보』1942.12.16.) 등의 글을 발표하고 「징병제 실시의 의의와 반도의 책무를 말한다」(『신시대』1942.7.)라는 주제의 좌담회에 참석했다.

1943년 조선공업협회 상무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연성위원회 위원, 국민총력경성부연맹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7월 민규식 · 김연수와 같이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청소년연성비 10만원을 헌납했다. 「이 전과를 생각하고 학병의 분기를 바란다」(『매일신보』1943.11.10.),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1943.12.17.)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인의 전쟁 협력과 학병 지원을 종용했으며, 그해 6월 해군협회가 주는 공로상을 받았다.

1944년 2월 전투기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8월 자본금 5,000만원으로 회사 설립 인가를 받고 10월에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했는데, 12월 일본 육군대신이 군수회사로 지정했다. 같은 해 3월 화신상사㈜를 화신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11월에는 모회사인 화신㈜과 통합했다. 1944년 식량협회 조선지부 이사, 재단법인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 이사, 피복협회 조선지부 이사, 조선중요물자영단 평의원, 조선상공경제회 설립위원과 이사, 종로총궐기위원회 위원, 국민동원총진회 감사를 맡았다. 그해 「신총독에게 기대-생산증강의 적극화」(『매일신보』1944.8.4.)라는 글을 실어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6월에는 황도주의(皇道主義) 확산을 목표로 한 대의당(大義黨) 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4월 조선비행기공업㈜에 투입할 기술 인력을 양성하고자 이사장으로 있는 광신상업학교를 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해서 240명을 선발하고 기술교육을 시켰다. 해방될 때까지 생산한 비행기는 연습용인 목철혼합시작기(木鐵混合試作機) 1기였다. 같은 해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글인 「대조(大詔)를 받자옵고-광영을 빛내오리, 발분정려(發奮精勵) 성은에 봉부(奉副)」(『매일신보』1945.4.5.)를 발표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의 조선군사령부와 군수협력에 대한 보상교섭을 진행하여 1945년 8월 27일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청산 자금 2,800만원과 갱생 자금 명목으로 2,000만원 등 총 4,800만원의 군수 보상을 받았다. 1945년 12월 조선비행기공업㈜의 상호를 조선기계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설립하여 취체역에 취임했으며, 1947년 10월 재단법인 흥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로 취임했다.

1949년 1월 주6에 1호로 체포되었으나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주7 정지 2년을 구형받았지만 9월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1950년 화신산업㈜ 사장, 흥한재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1953년 2월 자본금 5천만 환으로 흥한방적을 설립했다. 1955년 11월 화신백화점 건너편에 신신백화점을 지었고 1년 후 화신백화점도 복구했다.

1961년 5 · 16 후 부정축재자로 몰렸다가 경제재건촉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2년 군사정권의 권유에 따라 흥한화학섬유㈜, 인천도시관광㈜을 설립했다. 1964년 학교법인 광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정부의 지불보증으로 외자 1,050만 달러와 내자 4억원을 들여 당시 동양 최대의 인견사 공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막대한 외자 차입과 새로운 화학섬유 대두로 정상 가동을 하지 못한 채 1968년 10월 부실기업 정리대상이 되어 한국산업은행으로 넘어갔다.

1972년 12월 일본전자회사인 소니와 합작으로 화신 · 소니(자본금 10억), 1973년 10월 일본 봉제회사인 레나운 회사와 합작하여 화신 · 레나운, 1975년 2월 미국 타이거리싱회사와 합작하여 화신 · 타이거리싱 회사를 차례로 설립했다. 하지만 1980년 10월 323억원의 부도를 내고 도산하였고, 화신백화점도 매각되었다.

박흥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 · 13 · 14 · 17 · 18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87∼45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고승제, 한국경제신문사, 1991)
『실패의 교훈: 성자필쇠의 철리』(중앙일보사 경제문제연구소 편, 중앙일보사, 1988)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실록 재계백화』(배명진, 국제신보사, 1974)
『한국의 기업가』2(이경남, 문우사, 1973)
『경향신문』(1971.3.15; 1994.5.11.)
『매일경제』(1968.6.18; 1994.5.11.)
「1940년대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조선비행기공업㈜’」(정안기, 『경영사학』30-4, 20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주석
주1

이익을 적게 보고 많이 파는 것. 우리말샘

주2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주3

국토방위에 소요되는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개인이나 단체가 정부에 내는 헌금. 우리말샘

주4

일제 강점기에, 서울 남산에 세운 신사. 1912년에 조선 신사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가, 1925년에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에게 참배를 강요하였으나, 1945년 광복 이후 해체되고 소각되었다. 우리말샘

주5

잎사귀를 자르지 아니하고 그대로 말린 담배. 우리말샘

주6

1948년 9월에 공포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그해 10월에 제헌 국회가 설치한 특별 위원회. 정부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49년 8월 폐지되었다. 우리말샘

주7

국민이 국정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참여하는 권리. 선거권, 피선거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권리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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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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