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당시 회장은 박승직(朴承稷), 부회장은 유전(劉銓), 감사는 김용관(金鎔觀)·김정렬(金貞烈), 이사는 이태로(李泰魯)·이두용(李斗鎔)·윤우식(尹宇植)·김윤수(金潤秀)·이현재(李賢在)·김덕창(金德昌)·홍순필(洪淳珌)·양세진(梁世鎭)·이동선(李東善)·양재창(梁在昶)·최남(崔楠)·백홍균(白泓均)·홍태현(洪泰賢)·진학문(秦學文)·최윤석(崔潤錫)·박흥식(朴興植)·백낙중(白樂仲)·방태경(方台卿)·장홍원(張弘遠)이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을 전후하여 서울의 중심 상가였던 종로 상가는 극심한 곤경에 빠졌으나 일제는 1915년 「조선상업회의소령(朝鮮商業會議所令)」을 공포하여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일본인 상업회의소에 강제로 통합하였다. 경성상업회의소가 조선 상인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1925년 종로 상인들이 서로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권을 확장할 목적으로 중앙번영회를 조직했다. 중앙번영회는 경품부 대매출 등의 판촉행사와 야시 경영 등의 사업을 벌였는데,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발발하자 경성의 유력 상인들은 조직 대상을 경성부내 상공업자 전반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중앙번영회를 해산, 새로 경성상공협회(京城商工協會)를 결성하였다.
창립 초기 경성상공협회는 불경기 대책 상공업자 좌담회를 여는 등 의욕적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곧 종로 야시를 관리하여 매년 봄 상공업자 연합대운동회를 개최하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이 없이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1940년에는 일제의 방침에 따라 매년 개최하던 연합 대운동회도 취소하였으며, 1941년 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