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주의를 새 통치 방침으로 선전하면서 그 일환으로 1920년 3월 31일, 조선 경제 전반에 대한 강력한 통제 법규였던 조선회사령을 폐지했다. 이에 앞서 1918년 6월 26일 조선총독부는 조선회사령을 개정하여 일본에 본점을 두고 조선에 지점을 설치한 회사는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회사에 대한 각종 인허가 사항도 축소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 세력이 아시아 시장에서 일시 퇴각한 틈을 타고 급성장했다가 전후(戰後) 과잉 상태에 빠진 일본 자본에 투자처를 넓혀 주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 자본가들의 기업 설립도 크게 늘어났는데, 특히 조선시대 특권 상인이었다가 일제의 경제 침탈로 인해 몰락한 육의전 상인들의 기업 설립이 활발했다.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폐지되었으나 러일전쟁 이전까지는 정부 및 황실과 거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극심한 곤경 속에서도 그럭저럭 버텨나갔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한국 재정 전반을 장악한 일본이 거래선을 일본 상인으로 바꿈에 따라 육의전 상인들의 상업 기반은 거의 붕괴되고, 자본력이 있는 극소수 상인들만 종로의 소매상으로 명맥을 지킬 수 있었다.
조선회사령 체제 하에서는 자본을 모아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조선회사령이 페지되자 육의전 상인들은 각전 도중(都中)의 공유재산과 소속 상인들의 소자본을 모아 회사 설립에 나섰다. 선전(縇廛) 상인들은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지전(紙廛) 상인들은 조선지주식회사를 각각 설립했는데, 동양물산주식회사는 백목전(白木廛) 상인들이 설립한 회사였다.
회사 설립 준비는 1919년 7월에 시작되어 바로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었고, 8월부터 주식 모집에 착수했으며 11월 2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총회에서 선임된 취체역(取締役: 이사)은 장두현(張斗鉉), 김윤수(金潤秀), 한준석韓駿鎬), 장춘재(張春梓), 김윤면(金潤勉), 김동은(金東殷)이었으며 감사역에는 박승직(朴承稷), 이덕유(李德裕), 최준환(崔俊煥)이 선임되었다. 이들 중 장두현, 김윤면, 김윤수 등은 원(原) 백목전 상인으로 알려져 있고, 박승직은 배오개 객주, 김동은은 대한제국 장교, 이덕유는 역관의 후손으로 무역업에 종사한 거상(巨商)이었다.
사업 목적은 직물, 면포, 면사류의 수입 판매 등이었으며 자본금은 200만원이었다. 1919년에 설립된 조선인 회사 중 자본금 100만원 이상의 회사는 동양물산주식회사 외에 원산무역주식회사(元山貿易株式會社), 경원무역주식회사(慶元貿易株式會社), 경남광업주식회사京南廣業株式會社)의 4사뿐이었기 때문에, 동양물산주식회사는 당시 설립된 조선인 회사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설립 직후 동양물산주식회사는 1920년 소매부, 1921년 주단부를 특설하는 등 활발한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1920년대 초에 불어닥친 전후 공황을 이기지 못하고 1926년 9월 28일 해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