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8월 심성택(沈性澤), 이관식(李寬植) 등 17명이 발기하여 농상공부의 인허를 얻었고, 9월 18일 제1회 합자총회를 서울 중부 수전동(水典洞, 현재의 인사동과 공평동 사이에 걸쳐 있던 마을) 23통 8호에서 개최했다. 합자금은 심성택·이관식·배선환(裵善煥)·임병환(林炳煥)·전형진(田炯鎭)·최동혁(崔東爀)이 각 1000원, 조동선(曹洞禪)·이홍규(李鴻逵)·변순규(邊舜奎) 3인이 합 1000원, 김홍식(金洪植)·장명수(張明秀) 2인이 합 1000원, 조호영(趙祜永)·김도영(金道榮)·김재찬(金載瓚)·최세하(崔世河)·임서봉(林瑞鳳) 5인이 합 1000원으로 총 9000원이었으며, 여기에 입사금 1300백원을 합하여 1만 300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피혁 제조는 최하층 천민이 담당한 일이었던 데다가, 합자 사원 중에 관료 출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설립자들은 본래 피혁 제조와 연관이 있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회사는 1909년 11월 돌연 인가 취소 처분을 받았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1911년 자본금 350만원으로 창립된 조선피혁주식회사에 피혁 제조권을 독점시키려는 일제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