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교육 방침을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로 설립하였으며,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안창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교장에 윤치호(尹致昊),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형식(金瀅植)의 글에 의하면, 대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전국적인 성원과 지지를 얻었다.
중등학교 과정이었으나 수학을 중심으로 한 4학년 과정은 전문학교 정도와 대등하였고, 학교 설비도 중등학교로는 드물게 완비하였다고 한다.
특히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필요하므로 군사관(軍事官)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하여, 체육시간에는 군대식 훈련을 강행하였다.
1909년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전개하여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1910년 4월「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게 되었다.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하여 폐교당하였다. 대성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등과 함께 평안도지방의 교육 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민족 항일기 초기의 민족교육기관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