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무역주식회사 ()

근대사
단체
1939년 4월 박흥식이 화신백화점 무역부를 모체로 설립한 무역회사.
이칭
이칭
화신무역, 화신무역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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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9년 4월 박흥식이 화신백화점 무역부를 모체로 설립한 무역회사.
설립목적

박흥식(朴興植)이 이끄는 주식회사 화신(和信)은 1930년대 중반부터 계열사를 늘려 1930년대 후반에는 모두 5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회사로 성장하였다. 1935년 9월 대동흥업주식회사(大同興業株式會社), 1936년 3월 화신연쇄점을 설립하였고, 1938년에는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만주 붐’을 배경으로 만주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이에 만주의 잡곡을 수입하고 해산물을 수출하는 무역업이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원 및 변천

박흥식은 1938년 9월 화신백화점에 무역부(貿易部)를 설치하였으며, 1939년 4월에는 이를 독립시켜 자본금 275만원(4분의 1 불입)의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신설하였다. 사장에는 박흥식(朴興植), 이사에는 이기연(李基衍)과 이규재(李奎載), 감사에는 임헌경(林憲慶)이 각각 선임되었다.

화신무역의 영업 범위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것 같다. 예컨대, 1939년 10월에는 비타민 제조 원료인 어간유(魚肝油)를 만들 수 있는 고등어 간장(肝臟) 1000관(貫)을 주문받아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고, 1940년 1월에는 벨기에로부터 법랑철기(琺瑯鐵器)를 주문받기도 했다. 이러한 호조에 힘이어 화신무역은 1940년 3월 20일에 실시된 제2기[1939년 9월 1일~1940년 2월말] 정기총회에서 7%의 주주 배당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후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의 기업 합동 정책에 순응하여 1941년 9월 25일 화신무역회사(자본금 275만원)와 선일지물회사(鮮一紙物會社, 25만원), 화신연쇄점(200만원)을 합병하여 화신상사주식회사(和信商事株式會社, 500만원)을 신설하였다. 모기업인 주식회사 화신은 1941년 5월 대동흥업(大同興業, 200만원)을 합병하여 자본금 300만원의 회사가 되었다가, 1944년 11월 30일에 화신상사주식회사를 합병하여 최종적으로 하나의 회사로 통합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신무역주식회사는 1930년대 말 만주 대상의 무역업이 성행할 때 설립되어 큰 실적을 거두었고, 이후 총독부의 기업 합동 정책에 따라 주식회사 화신으로 통합될 때 그 일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화신무역회사창립 사장에 박씨」 및 「화신계합동(和信系合同) 6월말 실현」(『동아일보(東亞日報)』 , 1939.4.11)
「방기(放棄)된 고동어간장(古東魚肝臟) 간유(肝油) 원료로 양행(洋行), 미국서 화신무역으로 대량 주문」(『동아일보』, 1939.7.5)
「회사총회 화신무역」(『동아일보』, 1940.3.23)
「조선산 법랑철기(琺琅鐵器) 동란(動亂)의 구주(歐洲)로 화신무역에 대량 입주(入注)」(『동아일보』, 1940.1.7)
「일제하 한국인 자본가의 성장과 변모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경영을 중심으로-」(오진석,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논문, 1998)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中村資良 編, 京城: 東亞經濟時報社, 1942)
집필자
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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