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1920년 8월조만식(曺晩植) · 오윤선(吳胤善) · 김동원(金東元) · 김보애(金寶愛) 등 70인이 발기, 조직했으며, 같은 해 12월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전강연회를 여는 등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1923년 1월 9일유진태(兪鎭泰) · 이종린(李鍾麟) · 백관수(白寬洙) 등 20여 단체 대표들이 서울에서 모여 조선물산장려회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같은 달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協成學校)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 조선물산장려회 등을 조직하고부터이다.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집행기관으로 이사회를 두고, 그 안에 경리부 · 조사부 · 선전부를 설치했으며, 여기에 상무이사를 두어 회의 실무를 계획, 집행하였다.
창립 총회에서 유성준(兪星濬) · 김철수(金喆壽) · 김윤수(金潤秀) · 김동혁(金東赫) · 최순탁(崔淳鐸) · 박붕서(朴鵬緖) · 김덕창(金德昌) · 최경호(崔敬鎬) · 고용환(高龍煥) 등 20인이 이사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25일에는 당시 경기도 참여관이었던 유성준을 이사장으로 선출하였다. 평양과 동래에 지방 조직을 두었으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청년회와 상인회(商人會) 등으로부터 활동을 지원받았다.
창립 직후 맞이하는 구정 때부터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토산품이나 가공품을 염색하여 입고, 음식 및 일용품은 가능한 한 토산품을 사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계몽하기 위해 강연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하며 선전 활동을 벌였다. 활동을 시작하자 전국의 조선인들이 열렬하게 호응하여 조선 기업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나 이 열기는 채 1년이 못 되어 급격히 냉각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토산품의 가격이 급등해 기업과 상인은 큰 이익을 남겼으나, 서민들은 이에 반비례해 손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 때문이었다.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적 산업 기반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민족 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산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더욱이 이 운동은 유산 계급을 옹호하고 무산자의 혁명적 의도를 약화시킬 뿐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후 활동 방향을 바꾸어 소비조합을 조직하고 조선물산 진열관을 설립하며 조선물산품평회를 개최하는 등의 새로운 사업을 계획했으나 실현시키지는 못하였다. 결국, 그런저런 이유로 활동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기관지 발간만은 활발히 이루어져 『산업계』 · 『자활』 · 『조선물산장려회보』 · 『장산(奬産)』 · 『실생활(實生活)』 등을 간행하였다. 1929년 정세권(鄭世權)의 특지로 소생하는 듯했으나, 1934년부터 재정난으로 다시 침체되었고, 일제의 경제적 탄압 정책이 강화되면서 1937년 전반기에 이르러 조선물산장려회는 총독부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