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출신인 서울 유학생들이 친목과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지만, 설립 이후 1910년대말까지 활동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회장·부회장·총무·서기·의사부(議事部)·재무부·지육부(智育部)·사교부·체육부 등의 조직을 두고, 연 1회의 정기 총회와 월 1회의 월례회를 가졌다. 고향인 강원도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회와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춘계·하기 휴가 기간에 순회 강연회를 열었는데, 때로는 음악회도 함께 개최하여 지방 유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기부 받는 등 많은 호응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임시 총회를 열어 회장에 차이찬(車利瓚), 부회장에 노재명(盧在明), 총무에 김낙선(金樂善) 등을 선출하였고, 1922년 6월 정기 총회에서는 회장에 조학원(趙學元), 부회장에 노재명, 총무에 홍순혁(洪淳爀) 등을 선출하였다.
같은 해 7월 회관 신축과 기관지 발행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강원도 각지에서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주로 주제가 식민지 현실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7월 10일 춘천에서 행한 박용래(朴容來)의 강연은 일본 경찰에 의해 강연 도중 중단되었고, 같은 달 30일 평강에서의 박동렬(朴東烈)·박용래의 강연도 일본 경찰로부터 여러 차례 ‘주의’ 경고를 받았다.
1924년 6월 정기 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김원제(金轅濟), 부회장에 박용래 등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1925년경부터 침체기에 빠지자 1927년 6월 회의 재건을 위한 정기 총회를 개최,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고, 9월 강원도 고학생을 후원하는 자선 음악회를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