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2월 광문사문회는 특별회를 소집하여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박해령(朴海齡), 부회장에 사장인 김광제를 추대하였다. 또한 일본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와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의 친목 도모 및 교육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서상돈 · 김광제 등 회사 간부들은 1천 3백여만 원이나 되는 국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앞의 특별회에서 광문사문회의 개편 문제를 처리한 뒤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다.
참석자들이 모두 동의하자 김광제가 즉시 실현하자고 다시 제의하였다.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의하고 국채보상금 2천여 원을 출연하면서 취지를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사장 · 부사장 · 대동광문회장 · 부회장과 회원 장상철(張相轍) · 강영주(姜永周) · 심정섭(沈廷燮) · 김우근(金遇根) · 서병오(徐丙五) · 윤하선(尹夏璿) · 정재덕(鄭在悳) · 이종정(李鍾楨) · 길영수(吉永洙) · 이우열(李遇烈) · 강신규(姜信圭) · 정규옥(鄭圭鈺) · 추교정(秋敎廷)의 명의로, 2천만 동포가 담배를 3개월만 끊으면 국채를 갚을 수 있으니 담배를 끊어 절약한 담배 값을 모아 국채를 상환하자는 내용의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큰 호응이 일어나 국채보상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광문사는 국채보상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한매일신보 대구 지사의 사무를 다른 개인에게 넘겨 주었다. 김광제는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총무로 활동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전국 각지에 분립된 국채보상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회사 내에 조직된 대동광문회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동아동문회와의 친목 도모를 표방하였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