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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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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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경상도시찰관, 독립협회 제4기 재무부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서상돈(徐相敦), 아우구시티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1년(철종 2)
사망 연도
1913년
출생지
대구
관련 사건
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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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경상도시찰관, 독립협회 제4기 재무부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서상돈(徐相敦). 세례명은 아우구시티노. 출생지는 대구.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 · 상주 등지로 피난,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교난 때는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해버렸다. 1871년 대구로 돌아온 뒤 독학을 하면서 지물(紙物) 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 상당한 재벌로 부상했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대구교회 로베르(Robert, A. J., 金保祿)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다.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 갑부 대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 환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국채 1300만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모금한다는 것이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매천야록(梅泉野錄)』
『한국사』19·20·22(국사편찬위원회, 1981)
『독립운동사자료집』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독립협회연구』(신용하, 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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