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척살하고 현장에서 잡힌 뒤 여순(旅順) 감옥에서 일제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을 때인 1910년 1월, 연해주(沿海州)에 있는 한국인 교육자들이 안중근을 구명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재판에 변호사를 보내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자, 며칠 만에 수만루블이 답지하였으며, 재미동포들도 1만여 원이상을 보내왔다. 그 자금으로 러시아인과 영국인 변호사를 각각 1명씩 채용, 재판에서 안중근을 변호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