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걸(柳震杰) 등 30여 명의 고학생들이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고학생들의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 임원진은 회장 이필호(李弼昊), 총무 정명원(鄭命源), 내무부장 이상봉(李相鳳), 외무부장 이상현(李祥鉉), 문화부장 유진걸, 재무부장 유연표(柳淵杓), 상사부장(商事部長) 이종모(李鍾模), 의사부장(議事部長) 최영복(崔永福) 등이었다.
같은 해 10월 회장의 사망에 따른 임시총회를 개최해 회장에 백무(白武)를, 총무에 유진걸을 선출하는 등 일부 임원을 보선하였다. 본부는 동경에, 지부는 신슈(信州) 등지에 두었으며, 회원은 수백명에 달하였다.
회원간에 기쁜 일과 슬픈 일 또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주는 한편, 강연회·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을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동경 시내에 3개의 직업소개소를 설치해 1921년 1년 동안 60여 명의 회원에게 직업을 알선하였다.
역점 사업은 기숙사 건립이었다. 1922년 봄 동경 일화회관(日華會館) 부지에 기숙사 겸 회관을 건축했으나 협소해 증축하기로 하였다. 건축비만 7,000여 원이 필요해 같은 해 12월 동경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고, 1923년 여름방학 동안 서울·부산·전주·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연극과 음악회를 개최해 기금을 모금하였다. 국내와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성금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정기총회를 개최해 회장에 유기태(劉期泰), 총무에 이상현을 선출하는 등 임원을 개선하였다. 그런데 창립 초 임원 중 일부의 요청에 의해 기숙사 증축사업에 관여해 온 일본인이 고학생형설회를 일선융화단체(日鮮融和團體)라 선전하였다.
그가 1924년 8월 20일 고학생형설회 및 기숙사를 자신이 경영하는 단체라 하고, 일본인들에게 한국인고학생에 대한 동정을 대대적으로 요청하자, 비로소 그 동안의 사정을 알게 된 임원진과 회원들은 즉각 기존의 기숙사를 포기하고 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5일 새로운 사무실에서 회를 쇄신, 재건하는 총회를 개최해 임원진을 새로 선출하여 새출발을 하였다. 1925년 3월 1일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노동총동맹·무산청년동맹(無産靑年同盟) 등과 함께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진행 도중 일본경찰에 의해 해산당하자 장소를 옮겨 이를 강행하였다. 1922년 6월 기관지 『형설』 창간호를 발행했고, 1923년 6월『자유생활』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