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金光濟)는 1866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 출생이다. 유년 시절은 자세히 파악할 수 없지만, 사숙(私塾)이나 가숙(家塾)에서 전통 학문을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초명은 김홍제(金弘濟), 호는 동양자(東洋子), 시호는 석람(石藍), 자는 덕재(德在)이다. 1888년 4월 과거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직무 수행 중 이권 개입이나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지방 관리에 대해서는 엄단하였다고 한다.
1903년 윤이병(尹履炳) · 이규항(李圭恒) 등과 함께 공직 생활을 그만두고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공제소(共濟所) 운영에 매진하였다. 공제소의 설립 목적은 일본 제일은행권의 유통과 중국 청나라의 동순태상회(同順泰商會) 진출에 따른 각지의 객주 · 여각 등 상인층 보호에 있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상권 수호 및 자립경제 수립에 매진하려는 정신은 국채보상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같은 해 12월에는 우국충정을 담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지배층의 외세 의존적 자세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 교육 시행과 인재 육성, 엄정한 법 집행 등을 강조하였다.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圜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그 요지는 대한국민 2천만 명이 담배를 끊어 1개월간 담뱃값 20전씩을 3개월 저축하면 1,300만 환이 되므로, 전 국민이 3개월간 단연(斷煙)하여 그 돈으로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1300만 환을 갚아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은 결과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한말 국권회복운동 가운데 중요한 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1900년대 중반에는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기호흥학회월보』 등 애국 · 계몽운동 잡지에 국가사상, 경제학, 교육 등과 관련된 여러 논설을 게재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직후까지 대한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0년대 마산구락부(馬山俱樂部)에서 활발한 문예 활동을 펼쳤다. 1920년 3 · 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도쿄 유학생들과 제2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배포하고 제2의 3 · 1운동을 일으키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고조되자 1920년 4월 조선노동대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1920년 5월 2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식으로 발족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선노동대회는 주로 강연회 개최를 통해 노동자의 인격 향상이나 지식의 보급 등 노동자의 계몽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년 6월 28일 서울 상동교회 강연에서는 조선노동대회 회장으로서 '조선의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고, 같은 해 6월 25일에는 청주 노동대회 충북지회 창립식에서 노동 관련 연설에 600여 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지방 곳곳에서 노동대회 강연이나 노동야학 개설 등에 관한 협의를 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금주회(馬山禁酒會) 및 갈돕회 창립과 청주청년회 강연에 참여하는 등 지역, 청년운동에도 관심을 쏟았다.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괴질로 사망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