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金光濟)·문탁(文鐸)·권직상(權直相)·노병희(盧秉熙) 등이 노동자들의 상호 부조와 지적·인격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1920년 2월 16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발기, 그해 5월 2일 창립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총재에 권직상, 회장에 김광제, 부회장에 정규환(鄭圭煥), 총무에 유석태(柳錫泰), 간사에 김영만(金榮萬), 고문에 현영운(玄英運)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회장 김광제가 불과 2개월 만에 사망, 그해 8월 13일 임시총회를 열어서 임원진을 개편하였다.
이때 김광제의 심복이며 이 회의 별동조직인 조선민단(朝鮮民團)을 주도해 오던 김영만이 간부진에서 탈락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회장 문탁과 조사부장 노병희 사이에 반목이 생겼다.
문탁은 한말 이완용이 연관된 국민연설회(國民演說會)에 속해 있던 인물이었다. 1922년에 친일 단체인 동광회(同光會)의 이희간(李喜侃) 일파가 일제 의회에 조선내정독립청원서(朝鮮內政獨立請願書)를 제출할 때 합세해, 결국 노동대회에서 쫓겨난다.
문탁을 쫓아낸 노동대회는 회장제를 없애고 집행위원제를 채택, 노병희·유석태 등이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하는 서울청년회 계열 인사들이 대회를 장악하였다.
1922년 10월 21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지게꾼사정강연회’를 개최해 사설 지게꾼 단속사무소의 불법 징세와 무법 착취를 고발하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현상황을 바로 보고, 이를 개선하는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해 10월 25일에는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해 지게꾼단속사무소의 불법 행위를 성토한 뒤 지게꾼단속사무소를 파괴하였다. 또 그 사무소를 허가한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 지금의 중부경찰서)를 찾아가 허가 취소를 요구하였다. 이어 자유노동자의 단결을 더욱 굳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조합을 만들자는 결의 사항을 채택하였다.
그해 10월 29일 서울 한양여자강습소에서 자유노동자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를 개최, ‘경성자유노동조합(京城自由勞動組合)’을 결성하고 박용태(朴容泰)·나공민(羅公民) 등 70명의 이사(理事)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노동조합 설립 취지문이 문제가 되어 이항발·김사민 등의 간부가 체포돼 활동이 잠시 침체되었다.
1923년 7월 7일 제4회 대회에서는 안종영(安鍾英)·오상준(吳相俊)·김완규(金完圭)·이교홍(李敎鴻) 등 15명이 집행위원이 되었다. 여기에 이항발·김사민 등이 출옥, 합세하면서 경성자유노동조합은 서울청년회 계열과 더욱 밀착해 사회주의운동을 강화시켜 갔다. 그리고 이는 향후 신사상연구회(화요회로 개칭) 계열과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와의 대립을 불러왔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으로 통폐합되었는데, 이때 일부 세력은 1925년 3월 15일 경성노동회(京城勞動會)로 개편되었다. 노동대회는 노사 협조적 성격을 띠었으며, 지식층이 주도한 계몽주의적 단체로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와 더불어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한 선구적 단체였다.
조선노동대회는 노동운동의 방향과 일제의 탄압, 지도층의 불화로 조직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서울·개성·평양·청주·신의주·원산·연백·순천·부여·마산 등에 지부를 세우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