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 출신. 1939년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박효준(朴孝濬)·이태길(李泰吉)·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문예활동을 표방하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발족시켰다.
운동방침으로는 비밀 엄수, 매주 토요일에 회합하여 작품을 감상, 비판할 것 등이었다. 전후 9회의 회합을 통해 민족문화 존중과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41년에는 문예부의 기관잡지인 『학생』을 발간해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선양에 힘썼다.
한편, 긴박한 국제정세를 통해 한국의 독립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끼고 그 때를 맞이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임굉(林宏)·이무수(李茂洙)·이태길 등과 함께 1941년에 연구회를 조직하고 문예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 뒤 자신의 하숙집에서 수 차례 비밀 회합을 가졌다. 사범학교를 졸업해 교사가 된 뒤에는 우수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재 교육을 실시해 장차 독립될 때에 지도적 인물로 양성하는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경상남도 창녕 대합국민학교(大合國民學校)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민족의식 앙양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여름에 대구사범학교의 비밀 대중교양지인 『반딧불』이 일본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의 전모가 발각되어, 1941년 7월에 체포되었다.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