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강명규(姜明奎)는 1896년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文井面) 중탑동(中塔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호는 위석(渭石), 이명은 강복원(姜復元)이며, 이외에 강승원(姜承園), 강양원(姜陽園)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경성사립오성학교를 다녔으며, 보성전문학교 상과에서 공부하던 중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대일 무력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1919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21년부터 2년 동안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나석주(羅錫疇) · 이성(李成, 일명 李景材) · 송호(宋虎, 일명 宋虎聲) · 김기덕(金基德) 등과 중국 한단육군군관강습소(邯鄲陸軍軍官講習所)에서 공부하였고, 1923년에 중국 바오딩육군공병단훈련소(保定陸軍工兵團訓鍊所)에 입소하여 공병군사학을 수학하였다.
1924년에 통의부 군사부 의용군사과장 겸 지도부장으로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25년에 정의부 중앙심판위원이 되었다. 이때 이름은 강복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9년에는 신민부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노구교사건)〕을 일으키며 만주를 침략하자 민족운동 세력은 항일 유격 운동을 전개하였고, 강명규도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39년 구국동지회의 회장, 1945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의 부단장을 지냈다. 해방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을 맡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제2조사부의 조사원을 지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 1983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강명규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