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이명은 나리(羅李) · 김영일(金永一) · 나석주(羅石柱) · 마중덕(馬中德) · 마중달(馬中達) 등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6세 때 보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중국으로 망명을 꾀하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1년에 보명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에 가족을 데리고 만주 모아산으로 이주하였다. 왕칭현〔汪清縣〕 나자구에 이동휘가 세운 동림무관학교에 들어가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위독하여 1916년에 귀향하였다. 1918년에는 재령군과 이웃한 황주군 겸이포로 이주하여 쌀가게를 운영하였다.
1920년 사리원에 거주할 무렵 관전현(寬甸縣)에 자리한 대한독립단의 국내 파견 대장인 이명서가 대원 8명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8월에 황해도 은율군수를 처단하는 사건에 관여하였다. 그해 4월부터 자신도 직접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말부터 국내에 군사 주비단 결성을 추진하였다. 군사 주비단은 단원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홍보하는 동시에 의열 투쟁에 나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나석주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이러한 군사 주비단의 일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석주는 군자금 모집 과정에서 밀정(密偵)이 드러나자 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찰의 감시망이 좁혀 오면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21년 10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중국 톈진〔天津〕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12월 한국노병회의 추천에 따라 중국 군벌 우페이푸〔吳佩孚〕가 설립 운영하는 허베이성〔河北省〕의 한단군사강습소에 입교하였다. 졸업 후 장교로 임관되어 바오딩〔保定〕에 있는 중국군 공병단 철도대에 배속되었다.
1924년 쑨더푸〔順德府〕에 있는 중국군 제1사단 사령부로 보직되어 근무하다가 상하이로 돌아오면서 베이징〔北京〕에 들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4년 6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 경호원에 임명되었고, 상해대한교민단을 호위하는 의경대 사무도 맡았다. 김구의 지시를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보위를 위한 행동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3월경부터는 상하이를 떠나 국내 의열 투쟁 계획을 추진하였다. 권총과 폭탄 등 무기를 준비하고 경성으로 출발하려고 계획하였으나 귀국 비용 등이 부족해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폭파 대상 기관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조선은행 등이었다.
192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상하이에 돌아온 김창숙이 의열 투쟁 계획을 내놓았을 때 김구로부터 그 일을 실행할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해 4월 초 톈진에서 김창숙과 처음 만난 후 7월 최종적인 계획을 확정한 다음, 김창숙으로부터 1,000원을 지원받았다.
유자명 · 한봉근 · 이승춘과 함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배로 국내로 잠입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5개월 가량 시간을 소비하고는 단독으로 12월 24일 배에 올라 12월 27일에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경성으로 올라와 숭례문 근처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묵었다.
다음날인 12월 28일 여관을 나와 중국인 행세를 하며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경성 지점을 사전 답사하였다. 오후 2시 5분경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대부계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점으로 갔다.
오후 2시 15분경 정문에 들어서면서 책상에 앉아 있던 조선부업협회 잡지 기자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가다가 총소리에 놀라 뛰어나오는 직원을 쏘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들어가 과장과 과장 차석에게 총을 쏘았다. 곧바로 개량부 사무실로 들어가 권총을 난사하며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현관에 있던 수위와 시계방 점원을 쏘았다. 건물을 나와 황금정 길가에서 만난 경찰복을 입은 경기도경찰부 경무과 경부보를 쏘고 전찻길을 건넜다. 4~5명의 일본 경찰이 쫓아오자 걸음을 멈추고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라고 외친 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세 발을 쏘았다.
병원에 실려가 주사를 맞고 정신이 들어 경찰이 신분과 소속에 대해 묻자 자신은 의열단원으로 황해도 재령의 나석주라고 말을 하고는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