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은 1911년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금융기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은 독점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고 국고금을 취급하는 등 중앙은행 기능을 일부 수행함과 동시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취급하는 등 일반은행 업무를 겸영하면서 영리를 추구하였다. 조선은행은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만주 및 중국에 진출하여 일제의 국책을 수행하는 동시에 자행(自行)의 영리를 추구하였다.
강제병합으로 통감부(統監府)가 폐지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설치되자, 1909년에 공포된 「 한국은행조례」[법률 제22호, 1909. 7. 26]를 대신하여 「조선은행법」[법률 제48호, 1911. 3. 29]이 제정되었다. 대체로 「조선은행법」은 「한국은행조례」의 내용을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변경된 사항은 조선은행으로의 명칭 변경, 은행권 보증준비 발행한도의 확장[2,000만 원→ 3,000만 원]이었다. 그런데 법안 제정 과정에서 기존 한국 정부에 있던 조선은행 감독권의 소재를 두고서 조선총독부와 일본 대장성(大蔵省)의 의견이 달랐다.
기존의 「한국은행조례」는 구한국(舊韓國) 법률로 제정된 것이었는데, 법령에 감독 주체로 규정된 '정부'를 두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모두 조선총독으로 고쳐야 한다고 한 반면, 대장성은 일본 정부라고 주장하였다. 위임 입법체제를 근거로 한 조선총독부의 주장이 관철된 정부 원안이 제27회 일본 제국의회(帝國議會)에 상정되었다.
「조선은행법」은 일본 법률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였다. 그런데 의원 중 일부가 정부안에 반대하여 몇 개 항이 수정되었다. 그 결과 감독권의 주체는 일본 정부로 분명히 명기되었고, 조선은행의 기본적인 존립 근거에 관한 인가권(認可權)도 일본 정부에서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실제 법안에서는 조선총독이 상당한 정도의 감독 · 통제를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은 사전에 대장성과 협의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총독의 감독권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제한적인 조선총독의 감독권은 1924년 일본 대장성으로 완전히 이관되었다. 독점적 발권력(發券力)이 부여된 이상 조선은행은 제국의 견지에서 운영되어야 하는 기관이었다. 그 운용 주체도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 정부가 되어야 했고, 이는 조선은행 중역 인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은행 중역 인사는 일본 대장성이 행사하였으며, 구성에 있어서도 일본 경제 관료나 금융계 출신들이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감독권과 인사권을 통해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의 일원적인 지휘 · 통제하에 운영되었다.
「조선은행법」은 1911년 3월 29일 공포되었는데, 시행기일이 8월 15일로 규정되었기에 이 날짜로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였다. 10월 29일의 임시 주주총회에서 「조선은행정관」을 원안 그대로 가결하였다. 법령과 정관에서 규정한 조선은행의 조직과 운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존립 기한 50년의 주식회사 조직으로 자본금은 1,000만 원, 1주당 100원으로 하고 정부가 30%인 3만 주를 인수하였다. 존립 기간은 주주총회의 의결에 따라 정부의 인가를 받으면 연장할 수 있다. 주주는 ‘제국신민(帝国臣民)’으로 규정하여 일본인도 참여할 수 있으며, 주주의 절대 다수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둘째, 중역은 총재 1인, 부총재 1인, 이사 3인 이상, 감사 2인 이상으로 구성되었다. 단, 부총재는 1918년에 추가되었다. 총재 · 부총재는 임기 5년으로 일본 정부에서 임명하였다. 이사는 임기 3년으로 100주 이상을 소유한 자 중에서 주주총회에서 2배수를 선거한 후 조선총독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전에 대장대신(大蔵大臣)과 협의해야만 하였다[1924년 이후 대장대신]. 감사는 임기 3년으로 50주 이상 소유한 자 중에서 주주총회에서 선출하였다.
셋째, 조선은행은 국고금을 취급하고 독점적인 은행권 발행 특권을 가지는 중앙은행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법령에서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다. 즉, 일반은행과 마찬가지로 영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상업은행 업무를 취급하지 않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조선은행의 일반은행 겸영은 이후 식민지 조선 금융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조선은행은 '정화준비(正貨準備) + 보증준비(保證準備) + 제한외발행(制限外發行)'의 형식으로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정화는 금화, 지금은(地金銀), 일본은행권을 준비 물건으로 하였는데, 대부분은 일본은행권이 차지하였다.
정화 준비는 전체 발행고에서 최소 1/3 이상 유지해야 한다. 보증 준비는 국채증권, 기타 확실한 증권, 상업어음을 준비 물건으로 하였는데, 그 발행 한도액은 「조선은행법」에 액수가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한도액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법안을 개정해야 하는데, 「조선은행법」은 일본 법률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제국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보증 준비 한도액은 1909년 2,000만 원, 1911년 3,000만 원, 1918년 5,000만 원, 1937년 1억 원, 1939년 1억 6000만 원으로 확장되었다.
제한외발행은 정화 준비와 보증 준비 한도를 초과하여 은행권을 발행해야 할 경우, 인가권자[조선총독, 1924년 이후부터 대장대신]의 허가를 받아 발행하는 제도로 발행세를 납부해야 한다. 처음으로 제한외발행을 실시한 1917년 12월에 발행세는 5%였는데, 이후 1918년 6월 6%, 1919년 11월 7%, 1926년 12월 6%, 1927년 12월 5%, 1935년 4월 4%, 1936년 5월 3%로 개정되었다.
조선은행권 발행제도의 특징은 정화 준비에 일본은행권을 포함시킨 것이다. 식민지 조선은 대일 무역수지 적자로 인해 정화인 일본은행권이 유출되는 구조였고, 조선은행은 일본 단자시장(短資市場)에서 콜머니(call money)를 차입하거나 제한외발행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에서 조선은행에는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반면, 보증 준비 발행은 무이자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은행으로서는 수익상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보증 준비 발행한도액은 「조선은행법」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법안을 개정해야만 하였다.
총 네 차례에 걸친 한도 확장 사례를 보면 일제의 국책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8년은 만주 진출, 1937년 · 1939년은 중일전쟁(中日戰爭)이라는 일제의 대외침략 과정에서 한도액은 확장되고 있었다. 조선은행 영리 추구에 있어 가장 유익한 발행 방식은 보증 준비 확장이기 때문에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의 국책에 철저히 순응해야지만 이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은행권 발행제도는 1941년 ‘최고발행액 제한제도’로 전면 개정되었다. 일제는 「조선은행법 및 대만은행법의 임시특례에 관한 법률」[법률 제15호, 1941. 3. 3]을 공포하여 새로운 은행권 발행제도를 도입하였는데, 기존 발권제도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화 및 보증 준비 구별 없이 대장대신이 매년 최고 발행액을 정하도록 한 것에 있었다.
기존 발권제도에서는 정화 준비의 증감과 일본 의회에서 정한 보증 준비 한도 내에서 은행권을 발행하고, 만약 부족할 경우에는 제한외발행을 통해 발행하는 등 은행권 발행은 발권제도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에 따라 재정정책 담당자인 대장대신이 자의적으로 은행권 발행량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대장성은 1941년 4월 1일자로 조선은행권 최고 발행 한도액을 6억 3000만 원, 1942년도 최고 발행 한도는 7억 5000만 원으로 결정하였다. 1943년 이후에는 한도액이 갱신되지 않은 채 7억 5000만 원으로 고정되었다.
1941년 은행권 발행제도 개정은 관리통화제도의 전개와 더불어 일제의 전비 조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20세기 전반기 국제통화제도는 금본위제에서 관리통화제로 이행하고 있었고, 일본도 1932년 일본은행의 보증 준비 발행한도를 30여 년 만에 한 번에 8배 이상 확장시킴으로써 사실상 관리통화제도를 채택하였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통화 수요는 급격히 증대하였고, 일본은행과 조선은행 모두 두 차례에 걸쳐 보증준비 발행한도를 확장하여 대응하였다. 그러나 매번 의회의 법령 개정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급증하는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발권제도를 개정한 것이다.
1941년도 '최고발행액 제한제도'의 시행은 보증준비 발행한도의 자유로운 확장을 통해 조선은행권 증발을 가능케 할 단서를 열었다. 조선은행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일본은행권은 일본은행 예금이란 형태로 일본에 환수되었다. 또한, 중국연합준비은행과의 ‘예금 협정’을 통해 확보한 엔[円]자금은 국채소화(國債消化)에 전용되어 다시 일본 정부에 환류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인플레이션을 최대한 억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조선은행이 인수한 국채는 이후 보증 준비로 이월되어 한도 확장을 통한 조선은행권 남발을 가능케 할 조건이 되었다.
조선은행은 설립 직후인 1910년대 전반기에는 조선총독부 재정자금 공급에 집중하였다. 조선은행은 화폐정리 자금, 조선사업공채(朝鮮事業公債) 인수, 도장사금공채(導掌賜金公債), 임시은사공채(臨時恩賜公債) 매입의 형태로 조선총독부 재정을 원조하였다.
조선은행의 정부 대상금(貸上金)은 1909년 창립 시에 전체 대출액 중 40%를 차지하였는데, 강제 병합 때 일본 국고금으로 일부가 상각(償却)되어 1911년 상반기에 11.5%로 저하되었다가 조선사업공채 인수로 인해 1912년 상반기에는 다시 40%까지 상승하였다.
조선은행권 발행고에서 정부 대상금은 1910년대 초에는 60%를 차지하였으며, 1914년 말에는 34%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5년 이후 조선은행의 조선총독부 재정 원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은 채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설립되자 조선총독부 재정에 대한 자금 지원은 사실상 면제를 받았다. 이와 같이 조선은행 대출금 중 조선총독부에 대한 정부 대상금의 높은 비중은 식민지 초기라는 특수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17년 6월 일본은 「만주에서의 특수은행 기능의 통일에 관한 건」을 결정하여 조선은행이 만주에서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은행권은 만주에서 강제 통용력을 부여받아 법화(法貨)로 되었고, 1918년 1월부터 조선은행은 요코하마[橫濱]정금은행(正金銀行)에 대신하여 관동주(關東州) 및 만철(滿鐵) 부속지에서 국고금 취급 은행이 되었다. 영업 범위도 만주, 러시아령 시베리아, 산둥성[山東省]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은행은 일찍부터 일본 정부에 만주 진출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역수지 적자로 인해 조선에서 유출된 정화[일본은행권]를 만주에서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특수은행인 요코하마정금은행이 국책 금융기관으로서 은행권 발행과 국고금을 취급하였는데, 조선은행은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은본위제에 기반한 환업무(換業務) 중심 은행이라는 이유를 들어 배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은행은 일본 군부가 추진한 ‘선만일체화(鮮滿一體化)’라는 정책에서는 자행이 만주 국책 금융의 적임자라고 역설하였다.
조선은행은 만주 진출의 당위성을 제안하고 이를 실현시켜 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해외 은행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조선은행의 특권인 독점적 발권력은 일제 국책 수행을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동시에 상업금융을 겸영하고 있던 조선은행에게 은행권 발행 특권은 이윤 창출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조선은행이 만주에 진출하여 일제 국책의 수행 범위가 확대될수록 발권력의 확장에 따른 자금 운용력은 신장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은행이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이라는 국책의 체현(體現) 기관이 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은행이 조선의 ‘중앙은행’에만 국한된다면 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 결과 조선은행은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해외 은행’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행은 1917년 말 만주 진출의 실현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을 기회로 대출을 급증시켰고, 1920년에는 창업 이래 최고의 순이익을 기록할 정도로 큰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전후 반동공황(反動恐慌)이 발생하자 불량채권이 양산됨으로써 조선은행 경영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조선은행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만주 진출이 조선은행을 위기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1924년 말 현재 일본 대장성에서 파악한 조선은행의 불량채권 내역을 보면 원리금 상환이 연체되고 있는 불량채권은 전체 대출의 52.2%에 달했고, 특히 전체 대출 중에서 약 30%는 회수가 불가능한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1924년 말 현재 고정대출 중에서 약 60%가 결손(缺損)으로 처리되어야 했던 것이다.
지역별로 보면, 일본과 만주에 불량채권이 집중되었는데, 총대출에서 고정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본이 74.8%, 만주는 67.5%에 달하고 있다. 반면 조선은 18%로 위 지역들에 비해 양호한 상태이다. 회수가 불가능한 채권도 일본 45.4%, 만주 36.9%, 조선 7.8%로 예상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이나 만주에서 실시한 대출 중 약 40~50%는 전혀 돌려받을 가망성이 없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조선은행 정리에 대한 조선 내 여론은 정리 자체보다는 경제 호황 속에서 자금 대출이 만주나 일본에 있는 일본인 기업을 주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 비난이 집중되고 있었다. 호황의 이익은 만주나 일본 지역이 차지한 반면, 불황의 고통은 모두 조선에 전가되었다는 비판 여론이 비등하였다.
조선은행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적인 정리 계획을 입안하였으나, 이는 무책임하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우선 불량채권의 금액을 터무니없이 낮게 산정하여 세간의 의혹을 회피하려 하였다. 향후 경기가 호전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 속에서 어쨌든 현 사태를 모면하려고만 하였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실의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이 그대로 그 자리를 유지한 채 정리를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은행은 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고배당을 실시하는 등 부실을 최대한 숨긴 채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방만 대출의 주역들이 정리의 주체가 됨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행 정리는 일본 정부에 의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1924년 감독권의 완전 이관과 함께 대장성 주도의 정리 계획이 입안, 실시되었다. 조선은행 만주 진출의 주역이었던 전 총재 쇼다 카즈에[勝田主計]가 대장대신으로 있었던 1924년의 정리에서는 일본 정부의 자금 지원만 실행되었을 뿐, 조선은행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25년에 새롭게 입안된 정리계획에서는 자본금 50% 감자(減資) 공칭(公稱)자본금 8,000만 원→ 4000만 원, 납입자본금 5,000만 원→ 2,500만 원], 적립금 1,071만 1000원을 소각하여 모두 결손액 상각에 사용하였고, 창립 이래 처음으로 무배당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인원 감축 등 철저한 정리를 실시하여 조선은행에게도 그 책임을 지게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계 불황 등으로 인해 정리는 진척되지 못한 채 다시 1927~1928년의 일본은행 특별 융통을 지원받아 일단락을 지을 수 있었다. 조선은행이 일본 정부에게 지원받은 금액은 1억 2800만 원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 정리 과정은 조선은행이란 존재를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정리 과정을 통해서 조선은행은 이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금융 위기 시 발권력을 동원하여 구제금융(救濟金融)을 실시해야 할 중앙은행이 오히려 그 구제를 받는다는 역설은 여전히 영리를 추구하는 사적 금융기관으로 변용된 식민지 발권 은행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실질적인 정리 주체인 대장성과 일본은행은 결국 조선은행을 통제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만주중앙은행이 설립되어 독자적으로 만주국폐(滿洲國幣)[만주중앙은행권]를 발행하게 되면서 만주에서 조선은행의 위상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즉, 당시 금권(金券) 통화로서 유통되고 있던 조선은행권은 언젠가는 만주중앙은행에 회수되어야 할 존재로 그 시기만이 문제가 되었다.
마침내 만주국폐의 금권화 방침에 따라 1917년부터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부속지를 비롯하여 관동주 및 만주 지역에서 법화로 통용되던 조선은행권은 1935년 말로서 만주 내 유통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또한, 1936년 말 조선은행의 재만주 20개 지점은 1937년 1월 1일에 신설되는 만주흥업은행에게 이양됨으로써 만주에서 전면 철수하게 되었다.
조선은행이 만주에서 철수하게 되자, 대장성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을 조선의 중추 금융기관으로 확립할 것을 목표로 한 금융개편론을 추진하였다. 조선은행이 만주에 진출한 이후 조선식산은행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양 기관의 업무를 재편하여 조선은행을 명실상부한 중앙은행으로 기능케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안에 대해서 조선식산은행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조선은행은 행정 당국의 계획과 달리 조선 내 업무 조정 및 위상 강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주라는 해외 시장을 상실하였다고 생각한 조선은행은 그 대체지로서 중국 진출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고, 이를 ‘동아은행’이라는 거대 해외 은행 설립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당국은 만주 철수에 따른 보상으로 조선을 제시하였으나, 조선은행은 중국이라는 더 큰 시장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위의 금융개편론은 무산되고, 조선은행은 중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조선은행권은 중국 화베이[華北] 지역에서 군용통화(軍用通貨)로서 사용되었다. 전쟁 이전 조선은행 톈진[天津] 지점은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조선은행권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주둔군도 조선은행권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이것을 증발하여 군사비 지출에 사용한다는 방침이었다.
1938년에 들어 일본은 중국 점령지마다 발권 은행을 세우고 현지에서 은행권을 발행하여 전비를 조달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고, 화베이 지역에서는 3월 10일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설립되어 중국연합준비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여기서 일제는 특수한 금융 조작을 통해 새로운 전비 조달 방식을 고안하였다. 화베이 지역 발권 은행인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과 ‘예금 협정’을 통해 은행권을 발행하여 전비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예금 협정’ 방식에 따르면 일제가 임시군사비 특별회계에서 지출한 군사비는 실제로 중국에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중국연합준비은행의 예금 구좌에는 금액만 기재될 뿐인 ‘가공 예금’에 불과하게 된다. 즉,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에 대한 일본 엔[円]예금을 준비로 하여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엔자금은 모두 조선은행 도쿄[東京] 지점에 고스란히 축적되었다. 조선은행은 이 예금 협정 과정에서 확보한 거액의 엔자금을 국채 소화에 운용함으로써 전비 조달과 함께 일본 인플레이션 억제에 기여하고 있었다. 전비의 대부분을 일본은행권을 증발하여 조달할 수밖에 없었던 일제가 중국 점령지에 엔자금을 실제로 공급하지 않으면서 전비를 공급하기 위해 고안한 방식이 바로 예금 협정이었다.
이와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되면서 임시군사비 특별회계 항목에서 중국 화베이의 군사비로 지출된 엔자금은 조선은행을 통해 일본은행으로 다시 환류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금융 조작을 통해 일본은행권 증발 억제를 기도하는 동시에 일본 엔의 명목상 송금을 통해 현지 통화의 가치를 유지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국 점령지에서의 인플레이션은 격화되었고, 이는 일제가 구축한 엔계 통화권을 통해 연쇄적으로 파급되었다. 북중국의 인플레이션을 만주에서, 만주의 인플레이션을 조선에서 저지하려고 할 때, “조선 · 만주 국경은 중대한 대동아의 통화 바리케이드(barricade)”라고 조선은행은 언급하고 있었다. 즉, 조선은 일본 본토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선으로서 희생당해야 했음을 조선은행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대륙 인플레이션의 방어선으로 조선은행이 수행한 역할은 일본은행권과 대만은행권의 증가율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플레이션이 최고조로 달했던 1944년도와 1945년도의 통화 증발 추이를 비교해보면, 조선은행권이 일본은행권이나 대만은행권에 비해 월등히 빠른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행은 일본은행권에 비해 최고 48%p, 최저 20%p, 평균 37%p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같은 식민지 은행권인 대만은행권과 비교해도 역시 최고 49%p, 평균 25%p 정도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행을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이라고 규정하지만, 조선은행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국책 금융기관이었다. 조선은행은 발권 및 국고금을 취급하는 중앙은행, 민간인을 대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상업은행, 외국환 거래를 담당하는 외환은행, 해외 차관 업무 등의 기능을 모두 구비한 기관이었다. 조선은행 부총재 출신인 한 인물은 조선은행을 두고 만물상이라고 그 특성을 지적할 정도였다.
일제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식민지 조선을 위한 ‘중앙은행’이라기보다는 본국의 대외 금융 정책에 요구되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국책 금융기관이었던 것이다. 조선은행은 조선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 지역까지 진출하여 은행권을 유통시키고, 지점을 개설하여 일반은행 업무를 수행하였다. 영업소 기준으로 조선 내 비중은 22%에 불과하였는데, 중국[37%], 만주[24%]보다도 적었다. 조선은행의 지역별 대출 내역을 보더라도 1917년 이후부터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일본과 만주 지역이 조선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한 해가 많았다.
조선은행은 발권력이란 특권을 기반으로 일제의 국책을 수행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행에게 있어 국책 수행은 단순히 부여된 임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조선은행에게 있어 국책이란 영리를 보증해 주는 가장 강력한 그리고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여러 여건과 배경 속에서 보증 준비 발행한도가 확장되었지만, 이 확장이 결국 조선은행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조선은행이 국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일본 군부였다. 자본력에서 크게 열세였던 조선은행이 중국 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군부의 충성스러운 기관이 됨으로써 가능하였다. 조선은행은 일본 육군의 첨병을 자처하면서 침략의 선두에 서서 모험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은행을 국책 경쟁에서 살아남게 해준 동력은 바로 이것이었다.
조선은행이 수행한 국책은 군사적 · 침략적 속성을 본질로 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조선은행은 기업으로서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행을 대리하여 수행하는 국책에서 발생되는 위험은 모두 식민지 조선에 전가되는 결과로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은행 정리에서도, 중일전쟁 이후 중국 점령지 인플레이션의 파급에서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식민지 조선이 부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