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척식주식회사 ()

근대사
단체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
이칭
약칭
동척
단체
설립 시기
1908년
설립자
일본
설립지
경성
내용 요약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7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개정 이후 사업 범위를 만주 및 해외로 확장하였고,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개발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군수 공업화에 편승하여 대출 업무 이외에 관계 회사 설립 및 출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주회사(持株會社)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정의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
설립 목적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으로 약칭)는 1908년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동 출자로 설립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국책회사(國策會社)이다.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이끄는 동양협회(東洋協會)에서 동척 설립을 주도하였는데, 동양협회는 1907년 12월 정부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에 관한 보고」 등을 제출하였다.

이를 기초로 대장성(大蔵省)은 「동양척식회사법」을 각의에 제출하였다. 이 안에 따르면 동척은 순수한 일본 자본으로 설립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伊藤溥文] 통감에 의해 한국에서도 출자하게 되고, 임원에 한국인을 등용하는 등 동척은 한일 양국의 회사로 수정되었다. 1908년 8월 27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일본 법률 제63호, 대한제국 법률 제22호]이 공포되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116인의 설립위원이 임명되었는데, 일본 측 위원은 주로 고위 관리나 통감부 출신이었다. 한국 측 설립위원은 금융계 인사 및 귀족 7인, 지방의 각 도 지주 2명씩 26인으로, 총 33인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국 측 위원의 참가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설립에 관한 제반 사항은 일본인이 결정하였다. 1908년 12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1909년 1월 29일 경성 본점에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1,000만 원으로 1주당 50원씩 20만 주로 나누었다. 6만 주는 한국 정부가 토지로 현물 출자하였고, 14만 주는 한국과 일본에서 공모하였다. 일본 왕실과 왕족[6,000주], 조선 왕실[1,700주]이 우선 인수하고, 나머지는 일본 및 한국의 일반인에게 공모[13만 2300주]하였다.

설립 당시 동척의 주요 업무는 ① 농사 경영, ② 토지 매매 및 임차, ③ 토지 경영 및 관리, ④ 건축물의 매매 및 임차, ⑤ 이주민의 모집 및 분배, ⑥ 이주민에 대한 물품의 공급 및 생산 또는 분배, ⑦ 척식(拓殖)에 필요한 자금 공급, ⑧ 부대 업무 등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즉, 동척은 한국의 토지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식민 지배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던 것이다.

동척은 국책회사로 설립되었다. 국책회사란 국가적 사업 경영을 수행하기 위해 정부의 조례, 법률 등으로 설립된 특수회사이다. 국책회사는 법령에 명기된 특정한 사업만을 경영하며, 정부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다. 동시에 정부 출자나 지원금 등의 특혜를 누리는데, 동척의 경우 주주총회 결의 없이 정부의 승인만으로 사채(社債)를 발행할 수 있었다. 당시 상법에서는 납입자본금을 상회하는 사채 발행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동척의 경우 납입자본금의 10배 이상[1938년 이후는 15배까지] 발행할 수 있었다.

변천 및 현황

1908년 동척 창립 당시 가장 중요한 사업 목표는 조선으로의 일본인 이민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 내의 인구, 식량, 사회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식민 지배 체제를 보다 견고하게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동척은 1910년 이주 규칙을 제정하고 1911~1927년간 17차례에 걸쳐 계획을 실행하였다.

초기 이민은 두 종류의 형태로 시행되었다. 하나는 동척 사유지 2정보(町步)[약 1만 9835㎡] 정도를 할당받아 시가에 따라 연리 6%로 25년간 상환하여 토지 소유권을 양도받는 갑종 이민[자작농화]이다. 다른 하나는 동척 사유지를 빌려서 경작하고 소작료를 납부하는 을종 이민[소작농 육성]이다.

이 방식은 5회까지만 적용되었는데, 자작농[4446호]을 선택한 이민이 소작농[39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후 이주 규칙은 자작 이민에 지주적 요소를 추가한 ‘지주형’ 이민으로 전환되었다. 이 방식에 따르면 일본인 농업 이주민은 지주로서 조선인 소작농민에게 그 부담을 전가할 수 있었다.

동척은 1910년대에만 24~40만 명, 최종적으로는 조선인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300만 명을 이주시키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이주한 일본인은 약 4,000호, 약 1만 명이라는 초라한 실적을 낳았다. 그 이유는 우선 이주민을 수용할 토지가 부족하였고, 일본 농민도 이주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농민의 저항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민 사업은 기존 조선인 소작농의 경작권을 박탈하고 실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소작농들은 생존을 위해 격렬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동척의 이민 사업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는데, 동척 이민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농가 호수의 30~40%에 달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3년 말 현재 동척 이민 호수 3,895호는 전라도[32%], 경상도[30%], 경기도[16%], 황해도[14%]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일본의 대중국 정책은 큰 전환을 맞았다. 1915년 5월에 체결된 일화(日華)신조약에 의해 일제는 남만주에서 토지 상조권(商租權)과 상업 · 공업 · 농업에 있어 영업의 자유를 획득하여 남만주 경제 진출의 기반을 다졌다. 이 중 상조권은 일본인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토지 보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담보로 하는 대부가 가능하게 되었다. 동척이 만주에서 장기 대부를 담당할 기관으로 결정되어 만주에서 개발자금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에 맞추어 1917년 법령을 개정하였다. 제1조에서 영업 지역을 ‘조선 및 외국’으로 확대하였고, 그 목적도 ‘척식 사업 경영’에서 ‘척식 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 사업의 경영’으로 변경하였다. 개정 결과 동척은 만주를 비롯한 해외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본점도 경성에서 도쿄로 이전하였다.

대출 대상도 이전에는 ‘이주민 또는 한국 농업자, 공공단체’로 제한되었으나, ‘특별한 법령에 의해 조직된 산업에 관한 조합’ 및 ‘기타 일반 척식 사업을 경영함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 그리고 ‘법령에 의해 설정된 재단 기타 확실한 물건을 담보’로 확대되었다. 담보물과 상환 기간도 다양해지고 확장하였다. 이 개정으로 동척은 척식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을 전환하였다. 이후 동척은 영업 지역을 만주, 중국, 필리핀 및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지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이 개정을 계기로 동척은 만주에서 여러 사업을 전개하였다. 동척의 만주 사업은 주요 거점 도시와 농촌 지역의 부동산 금융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동척은 하얼빈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러시아인과 중국인 중심 시가지에 일본 기업 진출을 계획하였다. 당시 하얼빈은 북만주 대두(大豆) 경제의 핵심 지역으로, 이 대두를 둘러싼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와 중동철도(中東鐵道)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동척은 자회사[동성실업]을 통한 부동산 담보 금융을 실시하여 일본인 세력 확대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반동공황(反動恐慌), 1923년 간토[関東]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일본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경영도 역시 악화되었다. 불경기로 인해 지가가 폭락하면서 동척의 대출금이 고정화되어 불량채권이 증가하면서 회사는 부실화되었다. 이에 동척은 1924년과 1927년 두 차례 정부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정리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大恐慌)의 발발, 미곡 가격의 급락 등으로 인해 성적은 호전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일본의 금본위제(金本位制) 이탈로 인해 1932년 대미 환율이 폭락하여 외채 원리금 상환에 있어서도 막대한 환차손을 입게 되었다.

대외 악재가 겹치면서 동척은 오히려 1920년대 후반보다 1930년대 전반기에 상황이 더 심각하였다. 정리기에는 1926년 1년간 무배당을 실시하였지만, 1930년대에는 4년 동안[1932~1935년] 아예 배당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주요 활동

동척의 자금 조달과 구성의 실태를 보면, 회사채 중심의 조달과 대출금 중심의 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동척은 설립 이후 몇 년간 자본금과 차입금을 중심으로 자금을 조달하였는데, 1912년에 회사채를 발행함으로써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때 동척은 자금의 66%를 회사채로 조달하였고, 그 결과 전체 자금은 전년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후 동척 자금의 60~70%는 회사채로 조달되고 있었다[최고 81.2%, 최저 52.2%].

동척은 국책회사로 설립됨으로써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시 상법에 납입자본금을 상회하는 사채 발행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동척은 납입자본금의 10배[1938년 이후는 15배]까지 발행할 수 있었다.

동척은 1945년 7월까지 총 199회의 사채를 발행하였는데, 발행 누계액은 13억 1595만 엔이었다. 이중 중일전쟁 이후에 총 67회, 6억 4917만여 엔의 사채를 발행하였는데, 액수로 보면 전체의 약 50%에 해당한다. 동척이 발행한 채권의 약 70%는 일본 내 금융시장에서 소화되었고, 그중에서도 16개 은행단으로 구성된 신디케이트(syndicated) 은행단이 대부분을 소화하였다[공모는 단 4회에 불과]. 그 외 정부 인수분이 약 22%[대장성 예금부+간이보험], 외채가 8% 정도였다.

동척의 자금 운용은 크게 토지 · 건물, 대출, 유가증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17년 동척법 개정 이전에는 대체로 토지 · 건물, 즉 농업 경영 부문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반면, 대출은 20% 미만, 유가증권 투자는 10% 이하에 그쳤다. 그런데 1917년 동척이 척식 금융기관으로 그 성격을 일신함에 따라 대출이 1918년 전체 운용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대출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대출금 비중이 66%로 가장 높았던 1923년의 액수는 1916년의 그것에 비해 무려 26배나 많았다. 대출금은 1930년대 초반까지는 50~60%대였고,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40%대를 유지하면서 그 비중은 차츰 떨어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자금 운용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토지 · 건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대 말 10% 선까지 하락하였다. 이는 1917년 이후 동척 자금 운용의 중심이 농업에서 금융으로 전환된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토지 경영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과 관련된 1926~1937년 사이 20%대를 유지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10% 내외에 머물렀다.

전시기에 들어서는 유가증권의 비중이 매우 커졌는데, 1920~30년대 10% 내외였던 것이 1939년 이후는 30%를 넘어섰다. 1943년에는 유가증권이 38.9%로 40.5%의 비중을 차지하는 대출금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특히 1937년부터 1945년 6월 사이 대출은 2.5배 증가했으나 유가증권이 3.6배나 증가한 것을 보면 전시기 동척의 자금 운용에서 유가증권 투자가 가진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동척이 관계회사 주식 및 채권을 인수하여 지주회사로서의 성격을 강화한 결과이다.

동척 영업 지역은 조선과 해외였기에 대출도 지역별로 이루어졌다. 그 비중을 보면 조선이 60~70%대로 중심이었고, 그 다음은 만주였다. 동척이 만주에 진출한 첫 해인 1917년에 이미 전체 대출 중 만주의 비중이 30%를 차지할 정도로 동척은 만주에서 적극적인 대출을 실시하였다. 이런 추이는 1920년대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동척은 만주에서 종래 요코하마[横浜] 정금은행(正金銀行)이 담당하던 부동산 금융을 인계받아 농업 및 주요 시가지 건설 사업 대출을 실시하였고, 1918년에는 동성실업주식회사를 창설하여 중소상공업자를 대상으로 한 융자 업무도 수행하였다. 그 결과 1917~1922년 5년간 조선 내 대출은 6.4배로 증가한 것에 비해 같은 기간 만주는 13.3배나 증가함으로써 조선보다 훨씬 더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 결과 1922년 양 지역의 점유율 차이는 약 3%에 불과할 정도였다[조선 42.9%, 만주 39.6%].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 조선은 60%대를 유지하였으나 만주는 20% 중후반 대가 되어 양 지역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1930년대 조선 공업화 정책에 따른 조선 내 자금 수요의 증가와 만주국 수립에 따른 환경 변화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과 남양군도에 대한 대출은 192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증가하여 양자 합계가 17%까지 올랐으나, 이후 10%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동척의 자금 조달과 운용 실태를 보면, 1917년 이후 회사채로 조달한 자금 대부분을 그대로 융자와 투자에 돌리는 자금 순환 구조가 확립되었고, 이는 폐쇄 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동척의 주요 사업을 보자. 동척의 업무는 직영 사업, 대출, 관계회사 투자 등 세 가지 영역을 주축으로 한다. 전자를 사업 계열로, 후자의 두 업무를 금융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직영 사업의 경우 조선에서는 지주 경영을 주로 하는 토지 경영이나 사유지의 개간 · 간척 등의 토지 개량 사업, 임업 경영, 면양(緬羊) 사업 등을 들 수 있다. 관동주(關東州)에서는 제염(製鹽) 사업을, 강소성(江蘇省)에서는 면작(綿作) 사업, 천진(天津)에서는 방적 사업도 운영하였다.

먼저 동척의 토지 경영 실태를 보면, 동척 소유지는 출자지(出資地)와 매수지(買收地)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동척 설립 시에 한국 정부가 현물 출자의 방식으로 제공한 토지이고, 후자는 동척이 1909년부터 매입한 토지이다. 출자지는 논 1만 2522.4정보[약 124.2㎢], 밭 4908.3정보[약 48.7㎢], 잡종지(雜種地) 282.2정보[약 2.8㎢], 합계 1만 7712.9정보[약 175.6㎢]에 달한다.

1913년 말 기준으로, 매수지는 논 3만 533.9정보[약 302.8㎢], 밭 1만 2562.5정보[약 124.6㎢], 산림 1968정보[약 19.5㎢], 잡종지 2081.8정보[약 20.6㎢]로 합계 4만 7146.2정보[약 467.6㎢],이다. 출자지와 매수지를 합하면 총계 6만 4859.1정보[약 643.2㎢]에 달한다.

농경지에 국한해 본다면 1921년 논 5만 1800정보[약 513.7㎢], 밭 2만 1273정보[약 210.9㎢], 합계 7만 3073정보[약 724.7㎢]를 정점으로 이후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동척이 소유한 농경지는 전체 조선 내 농경지 중에서 대체로 논의 경우 약 3% 내외를, 밭은 0.7% 내외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농경지에서 논과 밭의 비율이 약 1:2의 비율인 것에 비해 동척은 7:3의 비율로 미곡 농업에 주력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척 소유 농경지는 전체 조선 내 농경지 중 약 1.5% 내외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일본인이 소유한 농경지를 대상으로 하면 초기에 동척이 차지한 비중은 40% 내외에 달하였으나, 1930년대 들어와서는 그 비중이 16% 정도까지 하락하였다.

동척에 소속된 소작농은 1918년경 15만 명으로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사유지의 처분과 집약적 관리를 통해 소작농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1930년대에는 8만 명 내외까지 감소하였다. 동척 소속 소작농의 수는 조선 내 소작농의 4~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척의 조선에서의 지주 경영을 살펴보면, 근대적인 회사 경영 조직을 도입하고 생산 과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강화하면서 생산의 합리화를 시도하였다. 동척은 소작료로 거두어들인 미곡 등을 거의 전량 상품화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였다. 동척 농장에서는 소작농에게 식량과 종자 및 비료를 대부해 주고, 농구와 농우 사용료도 대부해 주었다.

그런데 소작농민이 대부금을 기한 내에 상환하지 못할 경우에는 소작권이 박탈됨은 물론이고, 그가 차지할 수확물도 처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척 소작농민들은 대부-생산-상환을 거듭하는 존재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동척의 농업 경영은 자본가적 지주 경영으로, 동척은 자본주의적 합리적 농업 경영이라는 이름하에 한국 농민에 대한 수탈을 극대화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말경 동척이 관리하는 9개의 구역 산하에는 총 103개의 농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 가운데 74개 농장에는 사원 130명이 주재하였다. 농장에는 사원, 지점에서 파견한 수지원, 지도원들이 농사 개량 및 소작인 지도 · 감시를 하였다. 사원 아래의 보조자인 지도원 수는 1938년 말 1,001명으로 관리대상 소작인은 7만 8667명에 달하였다.

한편 동척은 1926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갱신계획’에 자금 공급 기관으로 참여하였다. 갱신 계획은 1938년까지 진행되는 것으로 계획되었는데, 토지 개량 사업 자금 3억 325만 엔 중 2/3 이상을 정부 알선 자금[1억 9869.6만 엔]으로 조달할 계획이었다. 자금은 동척과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각각 절반씩 공급하도록 하였다.

동척과 조선식산은행은 자금의 절반은 대장성 예금부 차입으로, 나머지 절반은 사채 발행으로 조달하였다. 전자는 연 5.1%로 차입한 자금을 연 5.9%로 대출하고, 후자는 연 7.7%의 사채 발행으로 조달한 자금을 연 8.9%로 대출하기로 하였다. 동척 내 담당부서는 토지개량부였고, 이 외에 동척과 조선식산은행이 출자하여 설립한 반관반민의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朝鮮土地改良株式會社)가 이를 대행하였다. 농사 개량 사업 자금은 4,000만 엔으로 동척이 1,400만 엔, 조선식산은행이 2,600만 엔을 자기자금 및 대장성 예금부에서 조달하도록 하였다.

토지 개량 사업의 경우 실적은 계획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1926~1933년까지 누계 실적은 계획의 61%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동척은 3,968만 엔을 집행하여 계획[5,875만 엔] 대비 67.5%의 달성률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경기 불황 및 미가 폭락 등으로 인해 1931년 6월 동척 토지개량부는 폐지되었고, 1934년 이후 자금의 신규 도입은 중단되었다. 농사 개량 사업의 경우 1926~1930년 계획자금 536만 엔에 대해 그 실적은 537만 엔으로 계획을 약간 상회할 정도였다. 그러나 농촌의 불황 등을 이유로 1931년 이후 자금의 신규 도입은 중지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동척은 지주회사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전시기 동척의 핵심 사업은 회사채를 발행하여 조달한 자금을 전쟁 관련 기업체에 투 · 융자하는 데 있었다. 중일전쟁기에는 압록강 전력 개발 사업 등 사회간접자본 및 산금(産金) 개발을 중심으로 한 광업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였는데, 이는 당시 일제 국책과 직접 관련된 것이었다.

태평양전쟁기에 들어서는 제조업 투자의 비중이 증가하였는데, 그 대상은 비행기, 선박, 금속기계 등 직접적인 병기 생산과 관련 있는 분야에 집중되었다. 핵심 군수공업에 대한 자금 조달을 담당하는 국책 금융기관의 성격이 강화된 결과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동척이 주식과 사채, 증권의 인수 및 매입을 통해 투자한 기업은 20개 남짓에 불과하였으나, 일제 패전 직전인 1945년 6월에 이르면 동척이 투자한 기업은 85개 사, 투자액은 2억 6152만여 엔이라는 거액에 달하였다. 85개 사의 지역 · 산업별 비중을 보면 조선의 광업[23.2%], 만주[관동주 및 중국 포함]의 제조업[20.2%], 남양의 농림 척식[18.5%]의 순이었다.

그런데 출자율을 보면 100% 직계회사는 조선의 8개 사를 포함해 13개 사에 지나지 않고, 관계 회사 대부분은 출자지분 50% 미만의 방계회사였다. 이러한 출자 구조는 동척 자체의 필요성이 아닌 국책상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척의 관계회사 간 상호 관련성이 적었고, 전액 출자 자회사가 소수였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전시기 들어 사업의 방향이 금융으로 편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척이 토지 경영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결코 적지 않았다. 토지 수입은 소작료, 토지 임대료, 농산물 판매 차익 등을 포괄한 것이다. 전시기 투자 동향을 보면 대출과 유가증권 등 금융에 대한 투자는 최저 65%에서 최고 77%로 거의 7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투자는 최저 4.6%에서 최고 10%로 한 자릿수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토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최고 37%이고, 대체로 20%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토지 경영의 경우 투자 대비 수익성이 매우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선인 농민들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장 많은 농경지가 조선에 있었고, 그 농사는 소작 경영으로 이루어진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동척은 조선인 농민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금 운영에 있어서 토지 경영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낮아져 갔지만, 동척 이윤 창출에 있어 토지 경영은 여전히 큰 공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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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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