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농과 자본제적 차지농(借地農)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후자는 토지에 자본을 투자하여 이윤의 획득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하여, 전자는 생활수단의 획득이 주된 목적으로 농업경영을 하는 것이다. 즉 소작농이 주로 자연경제적 생산을 하는 반면 자본제적 차지농은 상품경제적 생산을 한다. 따라서 소작농은 자기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 소경영생산자로서 지주적 토지소유에 직접적으로 예속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소작농의 발생은 일찍이 고려시대 초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고려 중기까지는 이들을 이용하는 대토지경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성행한 대토지 소유형태인 농장(農莊)의 경우도 기본적으로는 농장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된 노비 노동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독립적인 소농민 경영을 이용하는 경우는 품관(品官)·향리(鄕吏) 등과 같은 재지지주층(在地地主層), 즉 노비를 보유하지 못한 일부의 농장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과전법(科田法) 실시 이후와 특히 일반 공전(公田)을 중심으로 해서 병작반수(竝作半收: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물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소작제도)라고 불리는 소작제가 광범하게 전개되어, 차츰 귀족이나 중앙관료들의 농장에까지 파급되었다.
이러한 생산관계하에서 처간(處干:고려 때 왕실 소유의 장원(莊園)인 처(處)에 딸린 전부(佃夫)·전호(佃戶)·전객(佃客)·장객(莊客)·반상(伴上)·고공(雇工)·병작인(竝作人) 등으로 불린 농민계층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이들 농민층은 근대의 소작농과는 시대적 성격을 달리하는 존재로 당시의 연작농법(連作農法:한 땅에 같은 곡식을 해마다 심는 농법)이라는 농업생산력 단계에 대응하여 새로이 전개되기 시작한 병작경영을 통하여 형성된 하나의 역사적 범주였다.
조선시대의 직접생산자인 농민은 대략 노비·고공·전호, 그리고 원칙적으로 지주에게 직접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고 국가의 공부·요역을 부담하는 이른바 ‘자작농’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또 이들 상호간의 관계나 구별이 극히 불분명하였던 것으로, 이는 당시의 소농민경영의 불안정성에 그 원인이 있었다.
병작제의 성립과정에 있어서 이러한 다양성과 특질은 독립된 소경영자인 전호의 경제적 성장에 의하여 점점 지양되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병작제도 반수(半收)적인 성격만 남게 되었고, 순수한 경제적 관계로서의 ‘지주=소작’ 관계로 전환되어간다.
병작제가 신분적 예속을 벗어난 하나의 소작 관행으로 정착되고, 전호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주로 구두계약이기는 하나 관습적으로 경작기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사실상의 토지소유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 개간 등을 통하여 얻어진 정액지대(定額地代) 형태의 도지제(賭地制), 그리고 이 경작권을 상품화한 도지권의 발생 등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전호경영상의 커다란 진전이었다. 이것은 17세기 이래 나타나는 답작(畓作)에서의 이앙법(移秧法)·도맥이모작(稻麥二毛作) 및 전작(田作)에서의 대전법(代田法) 도입, 가래 등의 농기구 사용, 대폭적인 수리시설의 증가 등 일련의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농산물의 상품생산에 따른 국지적 시장의 발생과 상품유통의 전개 등에 의한 상품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한편 병작제하의 전호경영에 있어서도 소작계약의 내용, 즉 가래·소 등의 주요 생산수단의 제공 방법, 종자나 지세(地稅)의 부담방식, 토지개량비 등과 같은 경영비용의 분담비율 및 마름과 같은 소작관리인의 유무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나며 지역에 따라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주요한 특징은 한말까지 대부분의 전호가 국가에 직접 전세를 납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는 전호가 지주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토지에 대해서 사실상의 점유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에 의하여 행해진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소작인 납세의 의무가 폐기됨으로써 소작인이 소유하였던 관습적인 경작권, 즉 사실상의 점유권이 부정되었으며, 물권(物權)으로 인정받던 소작권도 소멸하였다. 또한 민유지(民有地) 안에 일방적으로 국유지가 설정되었으며, 소경영의 유지에 필요한 삼림·산야나 미간지, 기타 공유지 등에 대한 농민의 이용권이 박탈됨에 따라 농민의 토지로부터 분리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종래의 지주=전호 관계는 일제에 의한 지주제 보호·육성책으로 완전히 지주경영에만 유리하도록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20·1930년대 이후에는 농민자작지의 감소와 소작지의 급격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국외로의 대량 인구유출현상이 발생하여 1945년까지 전체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주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형성된 토지 없는 농민들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소작조건은 차츰 악화되고 지주의 권리는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소작료율이 대체로 수확물의 5, 6할 수준까지 상승하였으며, 소작료에 토지개량비, 종자·농기구·비료·농약 등의 농업자재의 선대이자(先貸利子), 지세·수리조합비 등의 공조공과(公租公課)의 부담 등이 포함되어 일부지역에서는 소작료율이 7, 8할에 이르러 빈번한 소작쟁의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소작료 수취방식은 기본적으로 현물지대의 형태를 취하였는데, 물납정액(物納定額)의 정조법(定租法)이 소작료의 고율화를 수반하였다. 또한 소작기간의 정기화 경향이 오히려 소작기간의 단축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지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소작농은 소경영자로서의 독립적 성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완전히 분리되어 조선시대의 전호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1949년의 「농지개혁법」의 공포를 통하여 종래의 소작농에게 농지를 유상분배함으로써 일제시대의 기생지주제(寄生地主制)는 소멸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의 불완전한 실시로 인하여 소작제가 다시 부활할 여지를 남겼다. 즉 농지개혁을 통하여 출현한 자작농의 상당 부분이 영세경영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과중한 지가상환의 부담으로 인하여 토지를 전매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수출산업 중심의 경제개발정책에 수반한 낮은 농산물가격 정책과 대량의 외국농산물 수입에 의하여 농촌경제의 사정이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는 농민과 토지가 적은 농민이 광범위하게 발생함으로써 법으로 금지된 소작제가 재발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소작료율도 5할에 달하는 등 농지개혁 이전의 소작관행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제한된 토지에 대한 수요 증대와 부동산 투기를 통한 부의 축적 경향으로 발생한 부재지주의 문제 등이 소토지 보유 영세농민과 새로운 소작 형태의 농민을 발생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