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마주이는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의 경우 40∼50곳에 거지들이 모여 살았으며, 동냥뿐만 아니라 넝마주이를 하기도 했다. 넝마주이는 사설막(대원들을 거느린 주인인 ‘조마리’가 관리하는 막), ‘자작’(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만든 막) 방식의 조직을 갖추고 망태기와 집게를 사용하여 폐품을 수집하여 판매하였다.
넝마주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정부의 감시와 관리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넝마주이는 근로재건대에 등록을 해야만 넝마주이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등록한 넝마주이는 지정된 복장과 명찰을 착용해야 했다. 넝마주이가 등록을 하지 않는 경우 폐품 수집을 할 수 없었으며, 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또한 넝마주이는 주로 도시 외곽의 다리 밑에 모여 살고, 초라한 옷차림으로 주택가에서 폐품 수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의 기피 대상이 되었고, 경찰에 의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서울시는 1981년 3월 넝마주이를 비롯한 자활근로대 1,000여명을 환경 미화라는 명목으로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정보사 뒷산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후 정부는 공공 부지 재활용과 도시 재정비 정책에 따라 1981년 12월 이들을 다시 서울시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를 비롯한 10개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1986년 넝마주이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극복하고, 아파트 단지 폐품 수집을 위한 장비 및 자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윤팔병을 중심으로 ‘넝마공동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1990년대 이후로 넝마주이는 쓰레기산업을 비롯한 폐품산업의 성장과 함께 사라져 가고 있지만, 가난한 노인들의 폐지, 종이 박스를 비롯한 폐품 수집이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