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에서도 고용은 존재하였지만, 그 사회가 세습적 신분제도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근대 자본주의적 의미의 고용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고용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의 보편적 인간 관계의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상공업과 시장의 발달로 대량생산을 위한 임금 노동자의 필요가 증대하고, 이에 대응하여 농촌에서 분리된 ‘과잉 인구’가 발생하여 생계를 위한 상공업 분야의 임금 노동에 종사하게 되면서 발생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계 유지를 위한 노동이 대부분 고용의 방식으로 실현되므로 한 국가의 고용수준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용수준은 현상적으로는 노동력의 수요와 공급 및 노동시장 요인에 좌우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노동력의 수요·공급 양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축적 과정과 그에 관련된 산업 순환에 의하여 규정된다. 따라서 한 국가의 고용수준을 비롯한 고용문제는 그 국가의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파악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고용은 자영이나 무급 가족 종사자를 제외하고 주로 임금노동의 피용관계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근대적 고용 형태는 개항과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농촌의 과잉 노동력이 임금노동자화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축적과정과 노동력 수요의 증대를 가져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농촌의 자영 소생산자층의 분해에 따르는 과잉인구를 발생시켰다. 바로 이 두 과정이 고용이라는 사회적 관계 발생의 기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12∼1918년 사이에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대규모의 몰락 농민이 생겨났고, 1920년대에는 일본의 자본과 상품이 유입됨에 따라 몰락 상공인이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대규모의 임금노동자들이 창출된 반면에, 이들을 흡수할 광공업·상업 및 공무와 같은 근대적 고용 부문의 형성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고용수준은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고용조건 또한 극도로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고용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이른바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한반도를 중국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제는 군사 중공업부문을 확대·발전시켜 조선인 노동자를 수탈, 고용하였을 뿐 아니라, 만주의 농업을 위하여 인적 자원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배 말기에 강제징병·강제징용 등 강압적인 인력동원이 실시됨으로써 노동력 부족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고용노동자의 총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고용사정이 나아졌다거나 더욱이 고용조건이 개선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용 규모의 증가는 일본 경제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수탈체제 강화를 의미할 뿐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또 다른 고용 형태가 나타났다. 8·15해방과 더불어 수많은 해외동포와 북한지역의 피난민이 유입되어 노동력은 갑자기 팽창하지만, 사회 혼란과 자본 및 기술의 부족 등으로 산업 생산은 극도로 피폐하여 고용수준은 나빠지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였다. 더구나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산업생산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어 고용수준은 한층 더 악화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복구과정에서 고용수준이 다소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1960년대 초까지는 낮은 고용수준이 지속되었고, 농림어업·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과잉 비대한 후진적 고용구조를 보였다.
1963년 경제기획원의 통계에 의하면, 취업자 총수는 766만 명인데, 그 가운데 63.1%가 농림어업에, 28.2%가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에 취업하고 있으며, 광공업(제조업) 취업자는 8.7%에 불과하였다. 취업자의 지위를 보면, 자영업자와 가족 종사자가 각각 37.2%와 31.3%나 되는 데 비하여 피고용자는 전체 취업자의 31.5%에 불과하였다. 이는 당시 소규모의 농업 취업자와 영세상공인 등 생계 위주 부문의 고용 비중이 현저하게 높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해방 이후에도 농지개혁이 철저하게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제 및 소농경영이 여전히 유지되었고, 대외원조법 등에 의하여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대량으로 도입됨에 따라 농업의 재생산 기반이 파괴되어 농촌지역 내 과잉인구는 더욱 증가되었다. 그에 따른 농민의 대량 유출, 즉 이농현상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광범위한 과잉인구가 축적되었다. 노동력의 과잉공급 속에서는 근대적 노동시장이 형성될 수 없었으며, 임금은 생계비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무제한 노동공급의 전제 아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공업화과정으로 진입하였다. 이후 지난 20년간 한국경제는 자본주의 방식에 의해 급속한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다. 한국의 자본 축적 과정은 외자도입, 저임금 노동력과 수출 및 국가정책을 기초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는 세계 자본주의와 일정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산업구조는 독점적·종속적 성격을 띠고, 국제 분업체제 안에서 한국의 산업구조는 급속한 조정과 변동을 겪었다. 그에 따라 산업별·업종별·성별 취업자 구성 및 종사자 지위별 취업자 구성에도 급속한 변화가 나타났으며, 취업자·임금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이 가중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노동집약적 경공업부문 위주의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으로 제2차 산업부문, 특히 제조업부문이 급속히 성장한 데 반하여, 1차 산업부문이 크게 줄어들었다. 총 취업자 가운데 광공업에 종사하는 취업인구 비율은 1965년에 10.4%(제조업 취업인구 비율은 9.3%)에서 1970년에는 14.3%(제조업은 13.2%)로,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에는 1955년 31.0%에서 1970년에 35.2%로 각각 증가하였다. 반면 농림어업의 취업인구 비율은 1965년에 58.6%에서 1970년에는 50.6%로 감소하였다. 이 기간 중 제조업 중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업종은 화학(14.6%)이다. 한편 종사자 지위로 볼 때, 자영업주와 가족 종사자는 각각 34.8%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고용 증대의 가속현상은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1970년대 초 국내외 경제 여건의 악화로 인하여 경기가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광공업 특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율이 현저히 증가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취업인구의 연평균 증가율은 1960년대의 11.7%에서 1970년대에는 6.8%로 감소하였으나, 총 취업인구의 증가율 3.7%와 2.2%보다는 훨씬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노동집약적 경공업부문의 국제경쟁력 약화로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불가피하였다. 이와 같은 산업구조 조정과정에서도 전기·전자·조선 등 노동집약적 중공업부문은 단순 조립가공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 노동력을 더욱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석유·화학공업이나 자동차공업 분야에서는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과잉노동 인구를 창출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업종별 취업인구의 증가추세를 비교해보면, 제1차 금속·기계제조업을 제외하고는 1960년대(3.7%)에 비하여 1970년대 취업인구의 연평균 증가율(2.2%)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특히 농림어업·광업에서는 1960년대에 비하여 1970년대에는 -0.7%와 -0.9%를 각각 나타내어 고용인구의 절대 감소를 보였다. 이처럼 취업인구의 연평균 증가율이 1960년대보다 1970년대에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나고, 경제성장의 내용에 따라 고용 흡수력이 다르기 때문에, 경제성장 속도와 고용규모 증대 속도 사이에 괴리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1979년 이래 선진 자본주의의 구조적 불황의 엄습으로 실업률의 증가, 제조업 취업자의 절대 감소, 제3차 산업 및 기타 서비스업부문 취업자의 비중 증가 현상 등이 나타났다. 총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 취업자 비율이 1980년에 34.0%, 1984년에 27.1%, 1985년에 24.9%로 대폭 감소한 데 비하여, 광공업의 경우는 1980년 22.6%였던 것이, 1984년에 24.2%, 1985년에 24.5%로 그 비중이 소폭 상승에 그치고 있다. 반면에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 취업자는 1980년에 43.3%였던 것이 1984년에는 48.7%, 1985년에는 50.6%로 그 비중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이는 농림어업부문을 떠난 노동력이 제조업부문보다 도소매·음식·숙박업·사회 및 개인 서비스업 등에 주로 흡수되었음을 의미했다. 총 취업자 중 피고용자가 차지하는 피고용률이 1981년에 50% 미만에서 1985년에는 54.2%에 이르고 있어 자영업주와 가사 종사자의 비율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74%나 대만의 64%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고용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로서 고용안정률(피고용자 중 상용근로자의 비율)을 살펴보면, 1981년에 66.7%에서 1982·1983년에는 68%선으로 증가하다가, 1984·1985년에는 63%선으로 하락하였다. 특히 1985년도 중 총 취업자의 종사상의 지위별 취업구조를 보면, 피고용자가 1984년에 비하여 6.0% 늘어나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즉 피고용률이 1984년의 52.9%에서 54.2%로 다시 상승하였다. 그러나 상용근로자에 비하여 일용(日傭) 및 임시직 근로자가 더 높은 증가율을 보임에 따라, 전체 피고용자에 대한 상용근로자의 비율로 표시되는 고용안정률은 1983년 이후 3년째 계속 하락하여 임금노동자의 고용상태가 불안정해졌다.
고용수준을 역사적으로 총괄해서 살펴보기 위해 고용률을 보면, 1965년 52.8%, 1970년 55.1%, 1980년 55.9%, 1990년 58.6%, 2000년 58.5%, 2010년 58.7%로 비교적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의 고용 관련한 문제는 1997년 IMF 외환위기, 2007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비정규직, 특수고용 등 불안정 노동력이 대규모로 발생하였고, 청년실업이 증가하고 있어서 고용의 양과 질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고용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기업, 업종 등에서도 수시로 고용관계의 단절, 즉 해고가 이루어지며, 명예퇴직, 희망퇴직 등으로 불리는 기업의 대규모 해고가 발생하여 피고용자의 경제활동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이 2011년 현재 60만 명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와 재중 동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은 한국내 사양 산업, 영세 기업에서 이루어지며, 한국 산업 구조와 고용관계에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