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대제는 광산의 주인과 계약을 맺고 채광하는 덕대가 노동자를 고용·관리하여 생산활동을 하던 광산 경영방식이다.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한말에는 국가의 승인하에 사금광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 자본가가 대거 광산주 및 물주로 등장하여 덕대를 지배하였다. 이 때문에 덕대는 독립경영자의 성격을 상실하고 피고용자 또는 하청업자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덕대제에는 종래의 물주제 또는 공장제 수공업의 성격은 없어지고 하청제의 성격만 남아 있다. 1981년 조광권 현실화로 덕대의 명칭은 사라졌다.
광업 경영방식은 관영광업, 합법적 관에 의한 설점수세제도(設店收稅制度), 비합법적 잠채(潛採)를 통한 민영 광업, 덕대제 광업으로 변화하여왔다. 설점수세정책(設店收稅政策:조정에서 광산을 개발하면서, 채굴권을 민간에 넘겨 세금만 걷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광산경영)이 1651년(효종 2)에 실시되면서 민영광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사금광업(沙金鑛業)의 경우 물주의 지원 아래 장인(匠人)으로서의 덕대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조선사회의 사회적 · 경제적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첫째 금과 은 등에 대한 국가수요 팽창, 둘째 상업자본 축적, 셋째 농민층 분화에 따른 이농민 증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덕대제는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고, 한말에는 국가의 승인하에 사금광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대한제국기에 광부들은 전업적 노동자만 해도 최소 1만 4천 명 이상이 되었고, 계절적 노동자까지 합하면 수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광부들 대부분은 덕대 휘하에서 금을 채취하였고, 덕대와 광부들에게는 광세(鑛稅)가 부과되었고, 광산 관리의 중간 수탈이 횡행하였다.
금광업 위주의 광업 생산은 개항을 한 후 5배 이상 증대되었으며, 새로운 경영방식과 기술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금광업의 발전은 대일(對日) 수출로 수요가 크게 증대하였고, 농민층의 과잉노동력으로 가능하였고, 이에 따라 덕대제가 크게 확산되었다.
덕대제의 생산조직을 보면 생산기술은 낮은 수준이고, 대부분 재래식 농기구가 생산도구로 사용되었다. 생산공정은 채굴, 배수, 운반, 1차정선(一次精選), 2차정선, 3차정선 등 몇 단계로 나누어졌다. 즉 분업과 협업에 의하여 생산되는 공장제 수공업적 기술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고용규모는 소상품 생산의 경우 두세 명 정도이지만 대개는 10명 이상으로 이루어지며, 많은 경우 30∼40명에 이르기도 한다.
덕대와 광부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현물임금제도로 되어 있어, 경제 외적인 강제를 기초로 하는 봉건적 잔재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광맥이 풍부한 곳에서는 전업적(專業的)인 광산 노동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계절적 노동자의 존재도 나타난다. 후자는 농민이 여가를 이용하여 일하는 반(半)노동자이다.
한편 물주와의 관계를 통해서 본 덕대제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는 기본적으로 물주제로서의 덕대제와 공장제 수공업으로서의 덕대제가 중요시된다. 그러나 개항기에는 물주제로서의 덕대제가 지배적이다. 이는 물주가 생산과정을 지배하는 생산 지배형과 그렇지 않은 생산 비지배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두 가지 모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주가 금광 관리인 경우에는 생산 지배형 덕대 경영이 많았고, 물주가 중간 집산지 혹은 최종 집산지의 상인인 경우에는 생산 비지배형이 많았다. 생산 비지배형은 원료 등을 선대(先貸)하여 덕대 경영에 기생하는 고리대적 착취에 머무는 유형과 이를 포함하여 상품의 유통 과정까지 장악하기 위한 물주제 유형이 구분되어 존재하였다. 그러나 광맥이 풍부하고 경영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평안도 지방 일대에서는 생산 비지배형이 상당히 발견되고 있다.
한편 사금광업의 성장과 덕대제 경영이 확대됨에 따라, 덕대제 내부에는 하청제로서의 덕대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즉 물주 또는 덕대가 광맥이 풍부한 광산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생산공정 중에서 굴토작업과 정선을 분리시켜 전자를 하청 주고 후자만 지배하는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 자본가가 대거 광산주 및 물주로 등장하여 덕대를 지배하였고, 마침내 덕대는 독립경영자의 성격을 상실하고 피고용자 또는 하청업자로 전락하기에 이르러, 그 뒤부터 하청제로서의 덕대제가 일반화되었다. 오늘날의 덕대제에는 종래의 물주제 또는 공장제 수공업의 성격은 없어지고 하청제의 성격만 남아 있다.
일제시대의 덕대제는 채광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덕대와 광부의 관계에 따라 모작패, 무회계(無會計), 대거리, 도가니, 걸갱(乞坑), 도급(都給) 등으로 나누어졌다. 모작패는 덕대 휘하의 광부 몇 명이 집단을 형성하고 덕대로부터 생활과 작업에 필요한 자금 융통하고 덕대의 감독하에 광혈(鑛穴)을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무회계는 덕대가 광부의 생활비와 작업 용품을 전부 부담하며, 광주에게 지불하는 것을 공제한 나머지를 덕대와 광부가 특정 비율로 분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거리는 무회계의 일종으로 생산물에 대한 분배 비율만 다른 것이었고, 도급에서는 덕대원(德大元)이 광주에 대해 광부를 대표할 뿐이었다. 도가니는 덕대 없이 광부들로만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 채굴하는 것이며, 걸갱은 주로 폐광 중에서 선광(選鑛)을 행하게 하여 분철을 거두게 하는 것이었다. 덕대제의 대부분은 모작패와 무회계를 뜻하며 주로 채굴 작업과 관련된 것이다.
1949년 귀속산업처리법의 임대 규정에 의하여 덕대인을 선임하여 덕대 개발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952년 11월 15일까지 덕대인이 선정된 광산은 121개였고, 조선광업진흥회사 소속의 덕대 광산은 200여 광구에 이르렀다. 1973년 광업법이 개정되어 덕대제를 조광권으로 법제화하였다.
1979년에는 덕대 업자 수가 185명이었으며, 종업원 5∼299명인 중소 탄광의 채굴 중 덕대 계약의 비율은 전체의 45.5%였고, 1980년 48.8%에서 1981년 3.7%, 1986년 10.6%으로 변화하였다. 1981년 조광권 현실화로 덕대, 도덕대, 분광, 조차 등의 명칭은 사라지고 모두 조광으로 바뀌었지만, 분덕대는 조광이 다시 하위 덕대와 조광 계약을 맺을 수 없도록 제한한 광업법 때문에 여전히 불법적으로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