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총파업이 일어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은 당시의 식량 문제였고, 정치적 배경은 공산당이 미군정과의 우호적 관계에서 대중투쟁을 전개하는 ‘ 신전술’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의 경제적 사정은 매우 심각하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식량부족 문제는 사회를 위기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다. 미군정청의 미곡수집계획은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합리한 미곡수집 가격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미곡의 자유 반입을 금지한 조처는 도시의 식량 사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군정 관료와 결탁한 모리배들은 쌀값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대중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이와 같이 식량문제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던 상황은 조선공산당의 행동전술에 매우 유리한 사회적 조건을 형성시켰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인해 1946년 9월 6, 7일에 박헌영(朴憲永) · 이강국(李康國) 등이 체포당하자, 조선공산당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당시의 민심을 이용하여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파업을 계획하였다.
결국 9월 총파업은 대중의 불만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갔던 참담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전략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월 총파업의 발단은 9월 13일 3,000여 명의 서울 용산의 철도국 경성공장 노조원들이 일으킨 농성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계속적인 점심의 제공,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실시, 미곡가격에 상응하는 임금인상, 식량배급 등의 요구조건을 미군정청 운수부 철도국장 맥클라인에게 통고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조합 명의의 문서는 접수할 수 없다고 하며 이를 반송하였고, 이에 격분한 경성공장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9월 13일 종업원총회를 소집하고 즉각 태업을 벌였다.
이 총회에서 노동자들은 일주일이내에 성실한 답변이 없을 경우 파업을 벌이겠다고 결의하고 임금 인상을 비롯한 7개 요구사항을 미군정 운수부 코넬슨 부장에게 전달했다. 9월 15일 미군정 당국과 노조의 회담이 결렬되었다.
노조는 수 차례 미군정 당국에 요구사항을 주장했지만, 9월 23일 코넬슨 운수부장이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라도 먹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지자 노동자들은 분노하여 즉각 작업을 중단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부산, 전남의 철도공장에서도 파업에 동참하였다. 철도 노동자들은 ‘남조선 철도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24일 운수부 코넬슨 부장을 방문하여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9월 23일 0시 부산철도국 7,000여 명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철도 파업은 오전 9시에 남한지역 전체로 확산되었고, 모든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튿날에는 서울철도국의 1만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함으로써, 남한의 철도교통망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태의 전개에 대해 미군정청이 노골적으로 탄압하자, 노동자들과 미군정청은 더욱 강경하게 대립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파업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고, 한편으로는 파업의 성격이 단순한 경제투쟁적 성격을 벗어나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9월 26일 출판노동조합 1,277명 노동자의 동정파업을 선두로 하여, 대구우편국 노동자 400명, 27일에는 서울중앙우편국 600명, 그 이후 중앙전화국 1,000명이 파업을 벌였고, 그 이후 교통, 체신, 식료, 전기, 토건, 조선, 금속, 해운 등 전평 산하 각 산별 노조원들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또한 각급 학교 학생들까지도 국립대학안 반대를 이유로 동맹휴학에 들어감으로써 파업은 더욱 대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그들의 요구조건에는 식량배급, 임금인상,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주택을 제공하라는 등의 경제적 요구 외에도, 노동운동의 자유, 테러의 배격, 북한과 같은 노동법의 실시, 민주주의 인사에 대한 체포금지, 정간중인 신문의 복간 등 정치적인 요구도 첨가되어 파업이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파업의 전개과정 중에서 우익측의 노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은 파업이 경제적 투쟁에 머물러 있던 초기 단계에는 그들의 수적 열세와 파업 요구조건의 정당성 때문에 파업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평이 파업을 점차 정치투쟁적 성격으로 전환시키자 그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다.
결국 파업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던 미군정청은 파업이 점차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면서 폭동화하자 9월 30일 새벽 5시, 경찰관 3,000명을 동원하여 농성중이던 철도노동자 1,000여 명을 검거하였고, 그날로부터 10월 1일 사이에 미군 · 경찰 · 대한노총맹원 · 우익청년단체 등을 동원하여 서울의 투쟁위원회본부를 붕괴시켰다.
이 파업을 통해 전평은 간부들이 대규모로 검거됨으로써 조직력이 크게 약화되어 붕괴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면 대한노총은 파업의 진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 조직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각 직장에서 전평의 주도권을 쉽게 탈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노총맹원들이 철도종업원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고, 대한노총이 9월 총파업에서 전평이 요구한 내용을 다시 미군정에 요구하여 받아들여졌다. 10월 14일 종업원 대표와 운수부 당국자와의 협정이 체결되어 9월 총파업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파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었다. 즉 9월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의 대규모 시위에서 비롯되어 경상도 전역은 물론, 충청 · 전라 · 강원 · 경기도 등 남한 전역을 약 2개월에 걸쳐 진동시킨 10월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결국 9월 총파업은 전평의 약화와 대한노총의 대두, 그리고 10월 항쟁을 가져온 미군정기 최대의 파업이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정치적 · 경제적으로 큰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 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