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발견하고 이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물의 영장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된 인류는 전기에너지가 실용화된 19세기 이후 전기가 갖는 조작의 편리성과 다른 에너지로의 변환 용이성, 환경 보존 및 상대적인 안전성 등의 특성으로 인하여 그 이용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여 인류 문화의 급속한 변모를 가져오게 되었다.
첫째로 전기는 밤과 낮의 구분을 철폐하여 24시간 문화 형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물질적·정신적 풍요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둘째로 실내와 실외, 지상과 지하라는 구분을 철폐하여 행동반경을 넓혀 줌으로써 공간과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가져왔고, 셋째로 기계문명의 극대화를 통하여 인류의 물리적인 힘의 확장 및 감각 영역의 확대로 관념문화의 변화를 창출했으며, 넷째로 통신 및 교통 수단의 발달을 매개로 하여 지구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기에 의한 인류의 시간·공간 및 능력의 확장은 사회의 전 부문에 그 파급효과를 가져와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견인차로,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전기의 중요성이 심화되고 있으며, 컴퓨터·반도체기술 등 전기 이용기술의 진보에 따른 정보화사회·고도산업사회가 진전될수록 전기는 인류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주역이 될 것이다.
(1) 초창기(1898∼1932)
우리 나라 전력사업의 기원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이근배, 김두승을 앞세워 사업을 신청하는 형식을 취해 1898년 1월 26일자로 허가를 받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이다. 이 회사의 건설과 운영은 미국인 콜브란(Collbran, H.)이 맡았고, 경영은 고종 황제가 임명한 한성부 판윤 이채연이 초대 사장을 맡았다.
한성전기회사는 설립 다음해인 1899년에 서울 흥화문(지금의 구세군회관 앞)∼동대문 간의 전차 개통식을 가졌으며, 그 이듬해에는 종로에서 우리 나라 민간 전등의 시초인 전등을 점화하였다.
그 뒤 이 회사는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결과 도산하게 되어 한미주식회사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며, 1905년에 일본의 강요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뒤로는 일본의 방해로 인하여 운영난이 더욱 가중되어 결국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신인 한일와사주식회사에 매수됨으로써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1914년 1월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시의 호경기를 타고 일본 자본의 한국에 대한 투자의 확대와 전력 수요의 증가에 힘입어 24개의 전기사업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내연기관의 발달은 전기사업을 더욱 확대시켜 74개의 군소업체가 난립하는 전기사업의 춘추전국시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전력사업은 각 부·읍의 시내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와사 또는 소규모의 화력발전설비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부전강(20만㎾)과 운암수력(5,120㎾)이 준공됨으로써 수력에 의한 도시배전시대라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23년에는 특고압 송전선로의 출발인 중대리(강원도∼서울 간) 166.9㎞의 66㎸ 송전선이 완공되었다.
(2) 발흥기(1933∼1961)
전력이 전등으로부터 사업의 원동력으로 비중이 높아지자 전기사업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와 조정이 불가피하여 정부는 전력통제계획을 수립, 시행하였다.
즉, 모든 전원개발사업은 민영에 의해 개발, 운영하는 대신 발전계획 및 송전사업은 정부 주도하에 통제를 받게 함으로써 자원 개발의 효율성과 운영의 합리화를 도모하였다.
배전사업은 이전의 1지역 1사업체제도에서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중부지방은 경성전기주식회사, 남부지방은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로 통폐합되었다. 이 기간중에 전력설비는 장진강수력(33만 4300㎾)·허천강수력(33만 3800㎾)·영월화력(10만㎾)·압록강수력(30만㎾) 등이 준공됨과 동시에 화천·청평·칠보수력 등이 착공되었다.
송전 설비는 1935년 10월에 평양과 장진강 제2발전소를 연결하는 154㎸ 초고압송전선의 준공을 시점으로, 평양∼서울, 영월∼대구, 상주∼대전 간을 연결하는 635㎞가 준공되었으며, 1941년 6월에는 허천강발전소에서 청진과 흥남 사이를 각각 연결하는 동양 최대의 220㎸ 송전선이 조선송전주식회사에 의하여 준공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 나라를 대륙 침공의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수력 및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부에 대규모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한편, 전시사업을 진흥 육성하기 위한 전원 개발의 국가 관리가 요청되므로 1943년 조선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주요 발전 및 송전사업을 통합함으로써 전력산업은 발전과 배전의 2개 부분으로 정비되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풍부한 전원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 남한의 설비용량은 총전력 설비의 12. 4%에 해당하는 19만 8000㎾(수력 6만 2240㎾, 화력 13만 6500㎾)에 불과했으며, 더욱이 발전량은 총발전량의 3∼4%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군정은 북한과의 전력협정에 의하여 총수요 전력의 60∼66%를 북한으로부터 수전하는 한편, 당인리·영월·부산 등의 노후 화력을 긴급 복구하여 발전하는 동시에 설비용량 2만㎾의 발전함 자코나(Jacona)호, 6,900㎾의 일렉트라(Electra)호를 도입하여 전력 수요를 충당했으며, 1947년에는 <전기소비법>을 제정하여 절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1948년 5월 14일 북한측의 일방적인 단전은 극심한 전력난을 초래하여 국민생활 전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뒤 1949년 준공된 목포중유발전소의 가동으로 전력 사정은 상당히 호전되었으며, 정부는 발전소 운영의 일원화조처를 시행하여 당인리·부산·영월(상공부)·보성강(농림부) 발전소를 조선전업주식회사에 이관시켰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목포중유발전소와 일렉트라호가 파괴되는 등, 발전설비의 20%가 파괴되어 최악의 전력난을 가져왔으나, 화천수력(5만 4000㎾)이 수복됨으로써 전후 전력 수급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전후 전력사업의 복구는 활발히 진행되어 1956년에는 당인리3호기·마산화력·삼척화력 등이 준공되었으며, 화천수력 3호기의 증설 등으로 전력난이 완화되었다.
한편, 광복과 더불어 제기된 전기사업체의 통합론은 전력회사 모두가 부족한 시설에다 그나마 가동률의 저하, 과다한 전력 손실, 자금 사정의 악화 및 만성적인 적자운영 등 분리운영에 따른 문제점이 지속됨으로써 꾸준히 추진되어, 1961년 7월 1일에는 역사적인 3사 통합의 실현을 보게 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3) 성장기(1962∼1986)
한국전력주식회사 설립 당시 총발전설비는 36만 7000㎾인 데 비해 수요는 43만 5000㎾로 추정됨으로써 심각한 전력 부족이 예상되어 전원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을 시점으로 한 제1차 5개년계획 기간중 부산화력을 비롯한 5개의 발전소, 즉 화천과 춘천, 섬진강수력이 신규 개발되었으며 구 영월화력의 복구로 최종 연도인 1966년 말에는 설비용량이 76만 9000㎾로 늘어났다.
특기할 것은 1964년 4월 1일을 기하여 광복 후 19년 동안 되풀이되었던 제한송전이 해제된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가전기기의 보급 등으로 전력 수요는 해마다 30%를 상회하는 고도성장을 함으로써 1967년 하반기에서부터 1968년 상반기에 걸쳐 다시 제한송전이 실시되었다.
정부는 이와 같은 어려운 수급 사정을 타개하기 위하여 민간 자본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여 동해전력주식회사·경인에너지주식회사·호남전력주식회사 등 3개의 민간전력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제2차 5개년계획 기간중에는 서울화력 5호기 등 모두 191만 1000㎾가 신규로 개발됨으로써 1971년 말의 발전설비는 262만 8000㎾로 확충되었다. 그리고 서울화력 1·2호기는 운전 개시 후 40년 만인 1970년에 폐지되었다.
1972년부터 시작된 3차 기간 초기에는 과잉 설비와 경기 침체로 공급 과잉현상이 초래되었으나, 후기에는 국내 수출산업의 급격한 신장(1976년 GNP 성장 15.1%)으로 예비율이 3. 9%까지 떨어져 일부 제한송전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 기간중에 개발된 전원은 영동화력·팔당수력 등 232만 5000㎾였으며, 그 동안 전력 계통 운용과 재정 부담을 가중시킨 동해전력주식회사와 호남전력주식회사를 한국전력주식회사가 인수하였다.
1973년의 석유파동은 지금까지 석유 위주의 전원개발계획을 일대 수정, 발전 연료의 다원화정책으로 전환하게 하였으며, 시설의 대용량화(30만㎾급)가 촉진되었다. 송변전설비에서는 1976년 3월에 우리 나라 전역을 연결하는 154㎸ 대환상선이 준공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여수화력과 신옥천변전소를 연결하는 189.3㎞ 345㎸의 송전선이 개통되었다.
송변전 분야에서는 급성장하는 전력 수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22.9㎸ 배전선을 확대하고 2차 배전계통로 220v로 승압함으로써 3사 통합 당시 선진국의 3배에 달하는 송배전 손실률(29.4%)을 1980년에는 6. 7%로 감소시켰으며, 가공 배전선의 공급능력 한계 및 도시 미관과 공급 신뢰도의 사회적 요청에 따라 1973년 서울 효자동과 광화문 구간의 지중화를 시점으로 서울·부산 및 경주·창원 등 관광단지와 공단 배후도시에 계속 추진하였다.
한국전력주식회사는 4차에 걸친 전원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으나 원리금 상환에 따른 자금압박 및 발전연료 가격의 폭등, 이익배당금의 부담 등 경영 여건의 악화로 내부적인 경영 성과에도 불구하고 재무구조는 계속 악화되어 1977년부터 5년간 민간주를 매입하여, 1982년 1월 1일부로 한국전력공사로 재발족하게 되었다.
제5차 기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 동안 추진된 탈유정책이 본격화되어 1982년 말에는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하는 중수로형 원전인 월성 1호기가 준공됨으로써 총설비용량이 1000만㎾를 돌파했으며, 그 뒤를 이어 대용량 저질탄 발전소인 평택 3·4호기가 준공되었고, 1985년에는 최대 용량인 95만㎾의 고리원자력 3호기를 비롯하여 삼랑진양수·섬진강수력·충주수력이 준공되었다.
1986년에는 역시 95만㎾의 고리 4호기와 영광 1호기가 준공됨으로써 1986년 말 발전설비는 1961년 당시보다 49배나 증가한 1806만㎾를 기록하였다. 발전 및 배전 시설의 확충에 따라 중앙급전도 1986년부터는 EMS(Energy Management System)방식으로 개조했으며, 지방 배전사령실도 SCADA(Supervisory Control And Data Acquisi-tion)시스템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등 시설 현대화로 운전의 효율화를 기하고 있다.
통신 분야도 1983년 10월 국내 최초의 광섬유 통신시스템의 개통(부산전력관리본부∼서면변전소 간 9.5㎞) 이후 그 영역을 점차 확대해 가고 있다.
(4) 성숙기(1987∼1990.2. 기준)
세계 경제의 침체 속에서도 우리 나라의 경제는 1980년부터 지속되어 온 ‘3저현상’에 힘입어 고도성장을 지속함에 따라 1989년 말 전력수요량은 8만 2155GWH로 연평균 12.8%가 증가했으며, 최대 수요 또한 1500만㎾를 기록하였다.
발전설비는 연평균 5% 증가로 1989년 말에는 2000만㎾를 돌파했으며, 원자력발전량이 총발전량의 50.1%를 기록하는 본격적인 원자력발전시대에 돌입하였다.
또한 경영합리화 노력으로 4차에 걸친 전력 요금 인하를 가져와 1984년 대비 연평균 3. 6%의 인하효과를 지속했으며, 그 동안 지적되어 오던 누진율을 완화하는 등 요금구조를 개선했을 뿐 아니라 1987년에는 5억 6000만 달러의 외채를 조기 상환함으로써 3사 통합 이래 외채 축소의 원년을 기록하였다.
송변전설비에서는 그 동안 전원개발사업에 치중되었던 설비투자를 공급설비 부문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수도권 일부 지역을 제외한 345㎸ 전국 환산망이 구성되었으며, 1989년 말 송전선의 회선 연장은 1만 8583C-㎞, 변전설비는 304개 소에 4만 3981MVA, 배전선로의 연장은 20만 5896㎞에 달하고 있다.
전기 품질에서는 급전설비의 컴퓨터화, SCADA시스템, 변전설비의 가스절연방식(GIS)화, 가공선설비의 지중화 등 공급설비의 단계적 현대화를 추진한 결과 1989년 말에는 송배전 손실률 5.75%, 정격주파수 유지율 98.1%, 규정전압 유지율 97.9%로 대폭 개선되었으며, 정전 시간도 연간 320분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경영에서도 공사비의 절감, 기술 향상 그리고 인력의 효율적 활용 등 경영 쇄신의 노력으로 1988년 한 해 동안 총 4조 4200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한편, 8900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국영기업체의 경영 성과를 국민에게 환원하고, 기업 체질을 강화시킨다는 정부의 민영화방침에 따라 포항제철주식회사에 이어 두번째로 기업공개가 시작되었다. 1989년 자본금의 21%에 해당하는 1억 2800만 주(6388억 원)가 국민주로 보급되었고, 1990년에도 추가로 보급되었다.
우리 나라의 전력사업은 1950년대까지는 주로 수력에 의존하여 만성적인 전력 부족현상을 보였으나 196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 따른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 기간이 짧은 화력 위주의 전력설비가 급신장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유류가격 폭등은 에너지정책을 탈유정책으로 전환하게 했으며, 공급체계에도 안정적·경제적 공급이라는 합리화의 방향으로 전환되어 원자력·유연탄·천연가스 등 탈석유 및 에너지원 다원화를 가져왔으며, 1985년을 분기점으로 원자력의 비중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
2001년도의 주요 전력사업 목표를 보면 총전력 수요는 1989년의 8만 2155GWH에서 2001년에는 15만 8808GWH로 향후 12년간 연평균 7.2%가 증가될 것으로 추정되며, 최대 수요는 2917만㎾에 도달될 전망이다.
따라서 발전설비는 1989년 2,004MW에서 3,572MW로 증가되며 발전전력량의 원별 구성비는 원자력 47%, 유연탄 39%를 점유하도록 계획됨으로써 전체 전력 수요의 대부분을 유류가 아닌 원자력과 석탄으로 충당하게 될 전망이다.
전기 품질에서는 송배전 손실률 6.0%, 규정전압 유지율 99.9%, 정격주파수 유지율 99.0%, 호당 연간 정전 시간 130분대 등 선진국과 대등한 양질의 전기가 공급될 전망이다.
한편, 미래의 경제사회는 첨단산업 및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양질의 전기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는 반면, 국민생활 수준이 윤택해짐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 환경 및 안전에 대한 관심도 증가, 서비스 요구의 다양화와 민주화·지방화 등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전력사업을 둘러싼 외부환경은 점점 어려워질 전망이다.
그러므로 전원개발계획은 이전의 수급 위주에서 계통·안정도 향상, 설비·신뢰도 향상 및 에너지 자립으로 이어지는 질의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될 것이며, 경영전산화 및 고객 편의 위주의 요금제도 개선 등 능동적인 봉사체제의 확립으로 지역사회와 공존공영하는 기업상을 정립하는 데 더욱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