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술은 1946년 7월 이후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해 채택한 전술이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이나 적대 행위를 자제하는 협력조합전술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술로 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인 투쟁과 물리적 저항을 하면서 미군정과 남한의 우익을 차별해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채택하였다. 미군정에 대한 우의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중을 조직해 단결시키고 국내외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점차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남한 내 정세는 조선공산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미군정의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도 있었지만, 공산당이 채택한 미군정에 대한 수세적 전술, 협조합작전술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세 판단은 조선공산당이 더 이상 미군정에 대해 방어 전술이 아닌 공세 전술로 나서게 했다.
조선공산당은 좌익진영의 물리적 토대를 소진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의 지지를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에 대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 신전술은 협력조합전술로는 더 이상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채택되었는데, 박헌영의 민주진영 간 협조라는 ‘8월 테제’를 기본 인식으로 한 것이었다.
신전술은 미군정과 우익에 대한 차별적 대응으로서 조선공산당의 정세판단은 박헌영이 신전술을 채택할 때도, 이전의 협조합작 전술과 유사하게 미군정에 대한 우의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에 대한 관계는 단순히 폭력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중을 조직해 단결시키고, 국내외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조선공산당이 초기 미군정에 대해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하에 취한 협조합작노선은 신전술 채택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신전술이 채택된 후 박헌영은, 미군정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으로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초기 미국을 진보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 초기에는 협조합작전술 하에서 전반적으로 미군정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물리적 충돌 행위를 자제했다. 그러나 1946년 좌익세력에 대한 미군정의 물리적 진압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에 따라 협조 전술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공세적 압박과 정당방위의 자위전술은 이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신전술의 정책 방향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전술은 대중들의 불만과 요구의 해결책으로 제기되는 민주개혁의 과제가 북한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선전함으로써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의 지지를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에 대한 공세적 압박을 통해 미소공위를 재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