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십일사건 ( )

정치
사건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이칭
이칭
대구10·1사건, 10월 인민항쟁, 10월항쟁, 대구소요, 영남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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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미군의 진주를 환영하였던 민중은 미군정의 정책이 기대와는 다른 내용으로 실시되자 미군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으로 전환하였다. 민중이 요구하였던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를 처벌하기보다는 군정의 요직에 기용하고, 토지개혁 등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여론이 더욱 높아져갔다. 1946년 3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결렬되어 통일국가 수립에 대한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다.

미군정에 대한 비판은 식량문제로 폭발하였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고 시장에서 쌀이 사라져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거나 굶주리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미군정은 미곡을 수집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46년 전국에서 발생한 콜레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교통을 차단하고, 더욱이 큰 홍수로 대체 농작물마저 부족하여 식량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정은 식량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보리 수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여 농민들과 충돌하는 등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미군정은 좌파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를 체포하거나 체포령을 내리고 미군정에 비판적인 좌파 성향의 신문을 폐간시키거나 정간 처분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은 여기에 맞서 미군정에 대한 타협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비판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신전술의 일환으로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미군정이 철도노동자의 감원과 임금지급방식의 변경 등을 계기로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46년 9월에 부산의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파업은 산업 전 분야로 확산되었다.

경과

전국에서 9월 총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10월 1일 대구역 앞에서 경찰이 전평 계열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하여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날 시민들이 대구부청과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의 사과와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며 점거하였다. 이후 대구 전역에서 시민들이 경찰과 우파 인물을 공격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대거 발생하였다. 미군정은 질서를 잡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서 오후에 질서를 회복하였다.

대구에서의 항쟁은 진압되었으나,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3일부터 성주 · 칠곡 · 영천을 비롯한 경상북도 대다수의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으며, 경상남도에서도 통영을 시작으로 진주 · 마산을 비롯한 대다수의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충청 지역에서도 10월 초순에 항쟁이 일어났으며, 10월 하순까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일어났다.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전라남도에서, 12월 중순에는 전라북도에서 항쟁이 일어나는 등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항쟁에 참여한 시민과 농민들의 요구는 다양하였다. 도시에서는 식량배급 실시의 요구가 가장 많았으며, 농촌에서는 식량공출의 반대, 소작료 3·7제 실시 요구가 가장 많이 제기되었다.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요구하였다.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친일파의 배격과 처단,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항쟁 양상은 지역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군중들이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를 공격하고 점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공격 대상은 경찰관과 군정 관리, 우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결과

항쟁이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자 미군정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항쟁이 예상되는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의 지도자를 예비 구금하거나 지역마다 진압 조직을 만들었다. 항쟁 지역이 광범위하여 미군과 경찰력이 분산되자 청년을 비롯한 우파 세력을 진압에 적극 동원하였다. 지역에서 항쟁이 발발하면 미군과 경찰을 즉시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항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진압 방식도 무자비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항쟁 과정에서 경찰과 우파 인물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경찰과 우파 세력의 보복이 많았다. 아울러 우파 세력의 테러 때문에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물적인 피해도 상당히 컸다.

항쟁이 발발한 후 미군정과 중도파 세력의 대표는 항쟁의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한미공동회담을 열었다. 한미공동회담은 항쟁의 원인을 경찰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 군정 내부의 친일파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남한의 최대 복리를 방해하는 선동 등이라고 밝혔다. 대책으로 군정 내부의 친일파의 처단 등을 미군정에 권고하였다.

항쟁으로 각 지역의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대중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피신하면서 이들 조직을 비롯한 좌파 세력의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에 우파 세력은 항쟁을 계기로 조직을 결성하여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10월 항쟁은 정치 · 경제 분야 등에서 미군정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한 성격을 가졌다. 항쟁은 미군정의 정책을 재검토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나 시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참고문헌

『10월인민항쟁연구』(정해구, 열음사, 1988)
『대구10월항쟁연구』(심지연, 청계연구소 출판국, 1991)
『10월 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김상숙, 돌베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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