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 출생.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근농(勤農).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며, 여운형(呂運亨)의 동생이다. 부인 김창희와의 사이에 여성구(呂聲九)·여명구(呂明九) 두 아들과 여견구(呂絹九)·여정구(呂貞九) 두 딸을 두었다.
1909년 중앙중학교를 거쳐 1910년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18년 오하이오(Ohio)주의 우스터(Wooster)대학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20년 미국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임시정부의 교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까지 상하이에 설립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지냈다.
1921년에 귀국하여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보성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수를 지내고, 1927년부터 1939년까지 미국에 본사를 둔 싱거(Singer)미싱회사의 조선감독원을 지냈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내용의 강연을 여러 차례하고 잡지에도 친일의 글을 기고하였다.
해방 후에는 친형 여운형과 같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당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외교대책전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에 조선인민당의 독자성 회복을 주장하며 당을 탈당하고,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대표가 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어 내무경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귀환한 후 통일운동의 역량 결집과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목표로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統一獨立促進會)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도 양평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고, 자유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을 상실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자문위원과 고문을 지냈다. 1973년 2월 3일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영문법』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