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49년 4월 정부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
개설
설립목적
기능과 역할
구체적인 가입대상자는 국가보안법 관련자와 남로당원을 비롯해 노동조합전국평의회 · 인민위원회 · 민주주의민족전선 ·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남로당 외곽 단체 구성원들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 창설 당시 취의서(趣意書)에서 전향자를 포섭하고 계몽하여 투철한 반공이데올로기로 교육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들을 중심으로 논리적 이론을 연구해 국민들에게 반공이데올로기를 고취시키고, 좌익계열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이론적으로 설복하며 궁극적으로는 좌익을 ‘압도 · 타파’하는 것이었다.
현황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자의 신분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들의 신분은 보장되지 않았다. 보도연맹원에게는 ‘공민권’이었던 도민증이 지급되지 않았고, 대신 ‘보도연맹원증’이 지급되었다. 이는 보도연맹원을 법적인 ‘공민’의 지위에서 제외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주거지를 옮기거나 떠날 때 반드시 관할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거주 · 이전의 권리를 제한받았다. 보도연맹원은 전향여부가 의심되어 경찰에 의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었고 정기적으로 동태를 감시당하는 ‘좌익혐의자’ 또는 ‘요시찰인’으로 취급되었다.
조직은 중앙본부와 그 외 지방조직으로 나눌 수 있다. 서울시연맹은 일반구외 특별구로 나뉘었고 각 구마다 반이 조직되었다. 지방조직의 말단 세포조직은 국민반(國民班)을 통한 분회(分會)를 조직하였고, 구에는 구연맹을 조직했다. 이는 서울특별시연맹의 세포조직과 동일했다. 지방지부의 조직원칙은 기본적으로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만들었으며, 도연맹 → 시 · 군연맹 → 읍 · 면지부로 구성되었다. 지방지부의 기본적인 지도방침은 검찰청 · 경찰 · 국민보도연맹이 협력하는 ‘지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보도연맹 결성을 관장했던 검찰과 경찰 주요 간부들은 국민보도연맹원 규모를 약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증언했다.
활동
사건 경과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 · 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 · 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 · B · C(D)’나 ‘갑 · 을 · 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 · 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 · 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 · 연행 · 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 · 공군정보처(G-2) · 해군정보참모실(G-2) · 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 · 경의 수사 · 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사건 결과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조직해소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 · 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백서』(경찰청, 범신사, 2007)
- 『조봉암과 1950년대(하)』(서중석, 역사비평사, 1999)
- 『사상검사』(선우종원, 계명사, 1992)
-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정희상, 돌베개, 1990)
- 『남로당 연구』(김남식, 돌베개, 1984)
- 『추적자의 증언』(오제도, 형문출판사, 1981)
- 『대공30년사』(국군보안사령부, 고려서적주식회사, 1978)
- 『육군 역사일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50)
- 『애국자』창간호, 2호(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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