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미·영·중·소에 의해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 점령군 사이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46∼1947년 사이에 1차의 공동회담과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원조하기 위한 미소 양국 간의 공동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으로 알려진 미소 공동회담이 미국의 아놀드(Arnold, A.V.) 소장과 소련의 스티코프(Shtikov, T.E.) 중장이 각각 대표를 맡아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은 분단으로 인한 경제, 행정상의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난항을 겪다가 2월 5일 1개월 이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회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회담의 개시와 더불어 소련측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 내 협의대상자의 선정기준으로, ①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할 것, ② 진실로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것, ③ 장차 한국을 대 소련침략의 요새지로 만들려는 반소련 집단이나 인물이 아닐 것 등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측은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모스크바협정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며, 따라서 신탁통치에 반대한다고 하여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 타협안이 제시되었고 4월 17일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이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코뮤니케’이다.
그러나 그 뒤,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두고 발생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5월 6일 무기휴회를 선언하게 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자 우익진영의 이승만(李承晩)은 정읍발언을 통해 단정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여운형과 김규식 중심의 중간파는 미국의 지원 아래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6년 말 과도 입법의원이 성립하게 되자 미국은 더 이상 좌우합작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었고 좌우 정치세력의 불참 속에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1947년에 들어서 독립국가 수립 등 한국문제 처리가 지연되는 데 따른 내외적 압력이 높아지면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위한 일련의 노력을 전개했다.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 중장과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Chistiakov,I.) 대장 사이의 서신, 그리고 미국 국무장관 마샬(Marshall,G.C.)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Molotov,V.M.) 사이의 서신을 통한 장기간의 교섭 끝에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공동위원회가 속개되자 국내 각 정치세력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좌익계와 중간파는 당연히 공동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한민당(韓民黨) 등 일부 우익 진영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뒤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위참가를 결정하였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김구의 한독당(韓獨黨)에서도 일부가 이탈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를 표명하여, 이승만과 김구의 추종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공위참가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6월 25일까지 공동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425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36개였다. 그러나 남북한 총 461개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는 7,000만 명이나 되어 당시 인구의 두 배나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예정대로 공동위원회의 미소대표들은 6월 25일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서울에서 가졌고, 또 평양에 가서 6월 30일부터 며칠간 본회의를 개최하고, 7월 1일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가졌다.
이처럼 진전을 보이는 것 같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8월에 들어서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 측의 ‘삼국 외상회의 결정고수’와 미국 측의 ‘의사표시의 자유’라는 제1차 공동위원회의 대립점으로 되돌아갔다.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 문제로 인하여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8월 중순 미군정이 불법 파괴활동을 자행한다는 이유로 남로당 및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면서 더욱 악화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과 공위업무를 지지해 온 남한의 좌익요인의 탄압은 공동위원회사업을 방해하는 처사”라고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측 대표 브라운(Brown,W.G.)은 “남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북한에 감금되어 있는 중요인사를 석방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양측의 대립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결국 1947년 여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실질적 결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전을 이룰 가능성이 없게 되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시켜 버렸다. 1947년 9월 17일 미국무장관 마샬은 2년 동안의 미소공동위원회의 노력이 성과가 없었음을 전제하고, “한국문제가 국제연합 총회에 상정됨에 따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한국을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국제연합 총회 소련 수석대표 비신스키(Vyshinskii,A.Y.)는 “한국문제의 국제연합 상정은 미소간의 협정을 직접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마샬의 제안은 9월 21일 국제연합총회 운영위원회에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18일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제62차 본회의에서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소장은 국제연합에서 한국문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소련 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였고, 10월 21일 50여 명의 소련 대표단 일행이 평양으로 출발함으로써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