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상은 이미 1950년대 이승만 정권때부터 시작되었고, 4 · 19 이후 장면 정권 당시에도 지속되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 중 하나가 한국과 일본을 긴밀히 결합시켜 반공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그 영향 하에 있던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영토, 배상 문제 등과 함께 국내정치적 문제도 얽혀 있어 협상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5 · 16 군사정변 이후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중심의 군부세력도 한일협상에 나섰으나 진척은 더딘 상황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별다른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집권세력은 일본 자본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한일협상의 핵심 쟁점은 청구권 문제였고 한일 간의 입장 차이도 컸다. 이러한 와중에 1962년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 차례 단독회담을 하고 청구권 문제의 최종적인 합의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10월 21일 열린 첫 회담에서 오히라는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제시했고, 김종필은 6억 달러로 맞서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김종필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도쿄로 들러 11월 12일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회담 전에 김종필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금 명목 불가, 총액 6억달러 관철’을 요구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훈령을 받았다. 두 사람은 3시간 30분간의 협상 끝에 청구권 문제를 매듭지었고, 그 결과를 ‘메모’ 형식으로 작성했다.
주요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하고 이를 양국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종필은 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오히라 외상이 받아들여 메모가 작성되었다.
메모 내용은 일본이 제공할 청구권 액수와 방식만 명기되었을뿐이며 자금 명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하고 한국에서는 청구권 자금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셈이었다.
애초 일본의 입장은 청구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7,000만 달러이며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추가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고, 한국은 청구권과 무상원조를 합친 개념으로 양보하면서 청구권 3억, 무상원조 3억을 요구했었다. 김종필과 오히라는 이러한 입장 차이를 조율해 문제의 메모를 작성한 것이었다.
메모의 존재는 야당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극소수 야당 의원들에게 공개되었고, 이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와 김종필은 또 다시 외유를 떠나야 했다. 1965년 한일협상 타결은 실제로 이 메모와 거의 차이가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음으로 보아 김종필과 오히라 간의 이 회담이 한일협상의 실질적 타결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