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다리』는 『사상계』가 폐간된 직후인 1970년 9월 김상현에 의해 창간되었으며 월 2만 부가 나갈 정도로 인기있는 잡지였다. 그러나 임중빈(任重彬)의 문제의 글이 게재되자 중앙정보부는 4개월이나 지난 1971년 2월 프랑스의 극좌파 학생운동(콩방디)과 미국의 극좌파인 뉴레프트 활동을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정부 타도를 암시하여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하는 내용이라는 혐의로 저자는 물론 주간 윤형두, 발행인 윤재식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미 유럽과 미국의 학생운동 동향이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기에 중앙정보부와 검찰의 혐의 내용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이유였다. 당시 필자 임중빈은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전기를 집필 중이었고 윤형두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용 간행물을 제작하고 있던 범우사 사장이었으며 발행인 윤재식은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였다. 뿐만아니라 잡지의 고문이자 자금 지원자이기도 한 김상현은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가 4월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치탄압의 의미가 컸다고 평가된다. 또한 검찰은 필자 윤형두가 이미 통혁당 사건 관련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전의 정이 없다는 점을 구속사유 중의 하나로 들기도 했다.
이 사건은 반공법 사건 치고는 드물게 1심에서 대법원까지 내리 무죄판결이 났다. 1심 판사는 문제의 글이 반정부적인 측면이 있지만 헌법에 보장된 언론 자유를 근거로 전원 무혐의 처리하였고 검찰의 항소-2심의 항소기각-검사의 상고라는 수순을 거쳐, 1974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최종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