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하여 단행한 초헌법적인 비상조치이다. 유신쿠데타라고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위기 및 남북대화를 빌미로 장기집권을 위한 ‘10·17비상조치’를 단행했다. 국회 해산과 정치활동 중지 등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정지, 비상국무회의가 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기능 수행, 비상국무회의의 헌법개정과 국민투표, 개정 헌법에 따른 헌법질서 성립 등이 그 내용이다. 개헌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유신체제라 불리는 권위주의 체제가 수립되어 1979년까지 지속됐다.
10월 유신의 정치적 동기와 배경에 대해 박정희는 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 변화와 안보 영향, ② 남북관계 변화, ③ 남북대화 지속 필요성, ④ 무질서와 비능률, 파쟁과 정략에 따른 남북대화 지원체제 약화 등을 열거하면서 체제개혁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추진한 이유는 국내 정치적 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박정희는 안정적인 권력재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69년 삼선개헌에 따라 치러진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과 박빙의 승부를 펼쳐야 했다. 더욱이 대통령을 세 번 연임한 상황이었기에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장기집권 욕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박정희로서는 권력 연장을 위한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고 더 이상 기존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8월에는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또한 파월 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 사건도 일어났다. 즉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대중의 분노와 절망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중적 분위기는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커다란 부담이었고 체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10월 유신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박정희와 최측근 몇몇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조차도 발표 며칠 전에 통보를 받았다. 헌법개정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은 중앙대학교 교수로 있던 갈봉근이었는데, 그는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과 미국의 대통령 중심제 등을 참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상적 근거는 독일의 파시스트 정치철학자였던 칼 슈미트(Carl Schmitt)였고,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예외상황에 대한 인식이 유신헌법 기초에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년사업’으로 명명된 10월 유신 준비작업은 공교롭게도 궁정동 안가에서 추진되었는데, 이는 유신체제의 시작과 끝이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셈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27일 유신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붙였다. 국민투표는 91.9%의 높은 투표율과 91.5%의 찬성을 얻었다(총유권자 84%의 찬성). 이와 같이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이 공포되고, 12월 15일 총대의원수 2,359명을 선출하는 선거를 1,630개의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하였는데, 당시 투표율은 70.4%였다. 이어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제1차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으로 재당선되었고, 12월 27일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유신체제의 기본 골간을 규정했던 유신헌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무시였고, 그것을 명료하게 보여준 것이 통일주체국민회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통령 선거인단의 역할이었다. 즉 기존의 직접선거 대신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것이었는데, 이는 장기집권을 위한 핵심 제도 장치였다. 게다가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규정을 전혀 두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선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국회의원 임기는 6년과 3년의 이원제로 규정되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규정되었다. 즉 권력의 2대 중추라 할 대통령과 국회를 구성하는 역할을 맡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장악한다면 권력의 재생산이 가능해 진 것이었다.
게다가 유신헌법은 국회의 연간 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심지어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 등은 제소하거나 이의도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명기하였다. 이로써 절차적 민주주의는 거의 훼손된 것이었다. 더욱이 헌법 개정방법을 이원화하여 대통령이 원하는 헌법개정은 비교적 쉽게 하고, 대통령이 원하지 않는 헌법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합헌적인 체제개혁의 길을 봉쇄하였다. 여기에 사법권의 핵심인 대법원장 및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함으로써 대통령은 입법 · 행정 · 사법의 3권분립을 넘어 초월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였다.
대통령의 초법적 권력을 상징했던 것은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비상조치권을 구체화한 것으로써 유신체제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지배장치였다. 총 9호까지 선포된 긴급조치는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기존 법과 제도를 뛰어넘는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특히 1975년 선포된 긴급조치 제9호는 이전의 모든 긴급조치를 집약한 것으로써 더 이상의 긴급조치가 나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유신 선포로 수립된 유신체제는 그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의 완전히 무력화시킴으로써 독재 · 권위주의 · 파시즘 등으로 표현될 만큼 폭압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유신체제는 5 · 16군사정변을 통해 성립한 박정희 체제를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변화시킨 것이었으며 대중의 반발을 수렴할 별다른 장치가 없는 체제였다.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주체적 민족사관’, ‘국적있는 교육’ 등의 슬로건을 통해 민족주의를 극력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산업화 과정을 통해 소외되고 억압된 대중의 반발을 민족주의적 동질화 논리로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대중의 불만이 제도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통로 중의 하나였던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파괴하면서 그 정당성을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국회가 파쟁과 정략에 빠진 비효율적 낭비집단 같은 것이라고 보고 일사불란하고 효율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즉 사회 각 영역과 계층 · 계급의 불만과 사회적 적대를 정치적 과정을 통해 조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유신체제는 역대 그 어느 정권에 비해 긴급명령 · 국가비상사태선포 · 위수령 · 대통령긴급조치 및 비상계엄 등의 강압적인 방법들을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발과 미니 스커트 단속은 비대해진 국가 강권력이 개인의 기호나 취미조차 통제하고자 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이러한 국가의 강제적이며 폭력적인 모습은 국가 자율성이 더욱 강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경제의 유신으로 불리는 8 · 3조치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사채 문제를 국가가 개입해 강제로 조정한 8 · 3조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 및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잘 보여주는 것이 유신체제기에 착수된 중화학 공업화였다. 따라서 정치 · 경제 · 사회 · 개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국가권력이 개입하게 되었고 그것도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렇게 경직되고 폭압적인 지배체제였음에도 다른 한편으로 유신체제는 광범위한 대중동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그것이었는데, 농촌에서 출발해 도시와 공장을 거쳐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된 이 운동은 파시즘의 대중동원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즉 유신체제는 고도의 억압과 대중 동원을 통한 지배체제 유지를 도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