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울시는 철거민 대책 중의 하나로 정착지 조성을 통한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광주군 중부면의 일부가 광주대단지로 지정되었다. 1969년 9월 1일부터 철거민 이주가 이루어졌고, 서울시는 땅을 분양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는 기반 시설을 전혀 조성하지 않았고, 이주민들은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천막이나 판잣집을 지어 생활해야 했다. 1971년 6월 조사 당시 취업대상자의 5%만이 단지 내에서 직업을 가질 정도로 지역경제기반조차 없었다. 하지만 살 곳을 찾던 각 지역 빈민의 유입이 급증하였고, 1971년 8월경의 거주인구는 15∼17만 명까지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비용 회수를 위해 서울시는 용지 처분을 서둘렀고, 1971년 총선을 즈음해 대단지의 투기 붐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서울시는 분양증 전매 금지와 함께 높은 가격의 토지대금 일시상환 조치를 발표하였다.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지는 가운데 일부는 광주대단지 제일교회 목사인 전성천을 대표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1971년 7월 19일 거리 집회를 개최하고 대지가격 인하 및 분할상환, 구호대책 마련 등을 담은 대 정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에 대한 응답 없이 분양가격 인상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경기도는 세금을 독촉하였다.
대책위는 ‘투쟁위원회’로 전환하였고, 8월 10일 최소 3만, 최대 6만에 이르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열었다. 당시 궐기대회에 참여한 주민들은 (1)백 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폭리 말 것, (2)살인적인 불하 가격 결사반대, (3)공약 사업 약속 말고 사업하고 공약할 것, (4)배고파 우는 시민 세금으로 자극 말 것, (5)이간 정책 쓰지 말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방문하기로 약속한 서울시장이 오지 않자 흥분한 주민들은 성남사업소, 출장소, 파출소 등 평소에 반감을 지닌 관공서를 파괴·방화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기동경비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했고, 차량을 이용한 서울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택식 서울시장은 당일 투쟁위원회 간부와의 협상에서 구호양곡 확보, 생활보호자금 지급, 도로 확장, 공장 건설, 세금 면제 등을 시급히 합의하였고, 오후 늦게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후 서울시는 최종적으로 서울시내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이주 중지, 광주대단지 내 재산의 경기도 이관, 경비 보조 등을 결정 내렸다. 광주대단지사건 과정에서 검거된 총 22명의 주민은 징역 2년 이하를 선고받았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났으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생성된 대규모 도시 빈곤층의 생존위협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준 빈민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2021년 3월 성남시는 광주대단지사건의 명칭을 ‘8·10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으로 변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