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도한 급속한 경제개발에 의해 고도성장을 달리던 한국경제는 1969년 이후 많은 기업의 재무상태 부실화라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 실태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각 기업 국내외 차입금의 상환 압박이 가중됨에 따라 개별 기업의 존립을 넘어 국민경제 전반의 파국을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수출경제를 주도한 제조업의 경우 기업의 타인자본 비율이 79.8%까지 올랐고, 총자본 이익률은 0.9%에 불과했다. 따라서 최후 자금조달원인 사채시장에 대한 기업의 의존도는 더욱더 커져 급기야 기업의 부도사태가 확산되었다. 사채시장의 월평균 이자는 3.84% 수준으로 기업의 회생과 존립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정도였으며, 기업 부도율은 건수 기준 0.58%, 금액 기준 0.53%로 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기업인들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처한 위기 상황의 타개를 위해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줄 것을 여러 차례 강력히 건의했다. 정부도 급박한 상황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 1971년 6·28 환율 및 금리 조정, 1972년 1·17금리 인하와 2·15당면경제시책을 발표했다. 또 사채를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려는 의도에서 「단기금융법」과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해 시행토록 했다.
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1971년 6월부터 내부적인 논의를 시작해 1971년 9월 극비리에 전담 실무팀을 구성, 비상대책의 성안에 착수했고 그 결과물로 8·3조치, 즉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이 발표되었다.
사채 동결과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국내외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비상대책의 윤곽은 전국경제인연합회장 김용완이 제안한 것으로, 최종적인 발표와 시행이 있기까지 논의와 결정, 추진 등의 구체화 과정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 김용환 대통령 경제비서관, 남덕우 재무부 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등 극히 소수의 인원에 의해 수행되었다.
원래 준비과정에서는 1972년 1월 15일이 긴급명령의 공포 시점이었으나, 정부가 1971년 12월 공포한 국가비상사태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제2312호)」을 계기로 정치적 갈등의 정황이 조성되어 발표 시점이 미루어졌다.
73개 조항 및 부칙으로 이루어진 8·3조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1972년 8월 2일 현재 기업 보유 사채를 동년 8월 9일까지 전부 신고하도록 해 신고 사채를 월리 1.35%(연리 16.2%)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조건의 채권·채무관계로 조정함으로써 기업의 사채 상환 부담을 경감시켜준다.
② 금융기관이 2000억 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장기저리 자금으로 금융기관의 기업에 대한 단기성 대출금 중 30% 해당액을 대환하도록 하되 대환 회수금을 한국은행에 예치시킴으로써 통화증발을 방지한다.
③ 정부는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과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에 각각 10억 원씩 출연하고 각 금융기관은 신용보증기금을 설치해 앞으로 5년간 대출의 0.5%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금으로 출연함으로써 신용보증제도를 확충한다.
④ 한국산업은행에 산업합리화자금을 설치하고 산업합리화심의회에서 정하는 합리화 기준에 따라 기업에 장기저리 자금을 공급하는 한편 중요산업의 고정설비 투자에 대한 감가상각할증율을 현행 30%에서 40∼80%로 인상하며 법인세 및 소득세의 투자 공제율을 6%에서 10%로 인상한다.
⑤ 재정의 경직성 완화를 위해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법정 교부금 등을 폐지한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이 내각에 지시한 5개항의 당면 경제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금융기관의 금리를 즉시 대폭 인하한다.
② 환율을 미 1달러 대 400원 선에서 안정시킨다.
③ 공공요금의 인상을 억제한다.
④ 물가상승을 연 3% 내외로 억제한다.
⑤ 1973년도 예산규모의 증대를 최대한으로 억제한다.
하지만 8·3조치 직후 사채신고 실적은 미미했다. 따라서 정부는 8월 4일 정해진 기일 안에 신고할 경우에 대해 어떤 사채이거나 그 자금의 출처를 묻지 않고, 관련된 각종 세금을 면제한다는 방침과, 반대로 신고 의무를 위반하거나 변제 책임이 면제된 사채를 변제할 경우 이를 증여로 간주해 65% 증여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의 보완조치를 취했다.
1972년 8월 9일 자정까지 신고된 기업사채는 총 4만 677건, 3456억 원이었다. 이는 재무부의 사전 추산액 1800억 원보다 훨씬 많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 통화량의 80%, 여신 잔액의 34%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리고 탈세를 목적으로 출자자 본인이나 그 가족 같은 특수 관계인이 자기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간 자기사채(위장사채)가 신고사채 전체액의 3분의 1이나 되는 1137억 원이었다.
8·3조치는 정부가 사채권자의 사유재산 상당액을 채무자 기업인에게 강제로 이전시킨 초헌법적 행위였다. 그럼에도 그 기획 및 시행의 주체는 8·3조치에 의해 기업 재무구조의 개선과 체질 강화, 자본시장의 합리화, 고도성장 추세의 회복 등 큰 전환과 성취를 낳았으며 국민경제의 위기라는 당시 상황에선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위장사채의 규모가 상당액임이 밝혀진 상황에서 해당 기업의 자구 노력이 선행되지 못 했고, 재무구조 부실화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한, 충격적이었으나 단기적인 방편에 머물렀다.
지나치게 급속히 고도성장을 이루려는 정부의 정책 풍토, 그리고 단기간에 대규모 재부를 축장하려는 기업의 무모한 투자행위, 과소한 자기자본 비율과 과도한 부채 비율 등이 초래한 국민경제적 위험성의 사회적 전가는 1960년대 이후 발전 와중에 고질화된 한국경제의 부정적 속성이었고, 1997년 IMF에 구제 금융을 받게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