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

정치
인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인.
이칭
후광(後廣)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4년 1월 6일
사망 연도
2009년 8월 18일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전라남도 신안
주요 저서
한국의 통일|대중참여경제론|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주요 경력
제15대 대통령
대표 상훈
노벨평화상(2000)|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2000)|무궁화 대훈장(1998)|국제인권연맹 인권상(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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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가이다. 1950년대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대까지 정치인으로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2000년 12월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인.
인적 사항

김대중(金大中)은 1926년 1월 6일(음력 1925년 12월 3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후광(後廣)이다. 목포제1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초등학교), 목포상업학교(지금의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주요 활동

1947년 1월부터 목포해운공사를 운영하고 이후 동양해운으로 바꾸고 해운 사업을 계속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목포에서 북한 인민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9월 28일 탈옥 사건으로 구명되었다. 이후 해상방위대 전남지구대 부대장으로 1951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6년 9월 30일 민주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1년 5월 13일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으나, 5 · 16군사쿠데타로 구속되었다.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에서 당선되었다. 1964년 4월 20일 자유민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으려고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발언(filibuster)을 하여 안건 처리를 무산시켰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민주체제론, 4대국 안전보장론, 3단계 통일론’ 등을 내세우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경쟁하였으나, 94만여 표 차로 낙선하였다. 이후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73년 7월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고 같은 해 8월 8일 민주통일당 당수 양일동(梁一東)을 만나러 도쿄에 갔다가 한국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었다.

1976년 3월 1일 ‘ 3 · 1민주선언(명동사건)’의 선언문을 기초하며 참가함으로써 ‘정부 전복 선동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 2월 29일 긴급조치 위반 시국사범의 복권에 따라 복권되자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복권 조치는 다행스러운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같은 해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신군부에 연행되어 7월 31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외국환관리법 위반,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관련자 23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기소되어 1981년 1월 2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같은 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1982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와 동시에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에서 각계 인사들을 만나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국내의 김영삼(金泳三)과 연락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였다.

1985년 2월 8일 귀국하였으며, 3월 6일부로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사면 복권되어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치러진 총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을 이끌어 제1 야당으로 만들었다( 민주정의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킨 것을 비판하며 합류하지 않았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193만여 표 차이로 낙선하고, 12월 19일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며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을 나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한다.”라며 정계 은퇴 선언을 발표하였다.

1993년 1월부터 6월까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방문하였다. 1994년 1월 27일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창설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를 거쳐 7월 18일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 복귀를 선언한 뒤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1996년 4월 11일 총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전체 의석의 1/3을 달성하지 못하고 김대중은 전국구에서 낙선하였다( 신한국당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유민주연합 50석, 민주당 15석).

총선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지민련)의 연대 협상이 진척되었다. 새정치국민회의 한광옥(韓光玉) 부총재와 자유민주연합의 김용환 부총재를 대표로 한 실무 협상이 진행되어 초안을 완성한 뒤, 1997년 11월 3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선언 및 서명식’을 열림으로써 이른바 디제이피연합(DJP연합)이 완성되었다. 같은 해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총 1032만 6275표(총유효투표 2464만 2438표 중 40.3%)를 얻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남북 회담 이후 남북 관계를 설명한 뒤 “북한과 미국 · 일본 · 유럽과의 관계 개선이 앞으로 한반도 평화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어 아시아 민주주의의 전통을 강조하고, “최근 동티모르의 독립 쟁취에 이어 앞으로 미얀마에서도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라고 연설하였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동교동 자택(지금의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학문과 저술

김대중은 평생을 정치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는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내가 걷는 70년대』, 『김대중 옥중서신: 민족의 한을 안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나의 길 나의 사상: 세계사의 대전환과 민족통일의 방략』,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남북연합을 중심으로』, 『나의 삶 나의 길』, 『옥중서신: 편지로 새긴 사랑, 자유, 민주주의.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과 『옥중서신: 편지로 새긴 사랑, 자유, 민주주의. 2,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김대중 자서전』 1, 2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정치가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며 국내외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으며 많은 상훈을 수상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제1회 동학농민혁명 대상(2011), 노벨평화상(2000),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무궁화 대훈장(1998), 국제인권연맹 인권상(1998), 미국 필라델피아시 자유의 메달(1999) 등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장신기,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
류상영, 『김대중 연보 : 1924-2009』(시대의창, 2011)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2(삼인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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