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새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통합전의 3개 정당의 인맥이 당내 계파로 존속하며 서로 갈등하였다. 민주계의 김영삼이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과거 통일민주당에 속하였던 민주계가 인원수에 있어서는 소수파이면서도 대통령 김영삼의 위력을 배경으로 당을 독단적으로 이끌었다.
이에 민주정의당에 속하였던 민정당계와 신민주공화당에 속했던 공화계가 반발하였다. 민주계는 이러한 반발을 약화시키고자 민정계와 공화계를 거세하기 위한 정치적 공세를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민주계의 공세에 밀려 김종필(金鍾泌)이 이끄는 공화계는 1995년 2일 민자당을 집단으로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패배한 것을 계기로 민정계가 김영삼과 민주계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공세를 전개하였으며, 그들은 최악의 경우 공화계처럼 집단으로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민정계의 이러한 정치공세가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1995년 10월 민정계의 배후지도자의 한 사람인 전직대통령 노태우(盧泰愚)의 부정축재·비자금 사건이 국회에서 폭로되었다. 그로 인해 11월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민정계의 민주계에 대한 정치공세도 약화되었다.
노태우의 부정축재사건으로 민정계의 정치공세는 약화되었지만 그 여파로 1992년의 대통령선거운동 기간 중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제공한 대통령선거운동자금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야당으로부터 가해지는 대선자금 공개촉구 공세를 약화시키고 동시에 집권당 내부로부터의 민정계의 도전을 완전히 봉쇄하기 위하여 김영삼은 돌연 소급입법인 5.18관련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을 국회에 요청하였다.
야당은 여당의 내분을 조장하기 위하여 이전서부터 5.18관련자들의 처벌을 주장해왔었기 때문에 그러한 특별법제정에 쉽게 동의하였다.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제정되자 김영삼정부의 검찰은 민정계의 대부인 전두환(全斗煥)과 민자당에 참여하고 있는 군부 출신의 민정계 핵심인사들을 구속하였다. 이러한 충격적 조치로 인해 정계와 국민의 관심은 김영삼의 대선자금이나 실정으로부터 벗어나 전두환·노태우의 재판으로 집중되었다.
전두환·노태우의 구속과 재판으로 정치적 위기를 벗어난 김영삼과 민주계는 차제에 집권당 내의 민정계를 더욱 철저히 무력화시키기 위해 ‘역사 바로세우기’·‘5·6공 잔재청산’ 등을 구호로 내걸고 집권당인 민자당을 쇄신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민자당 쇄신작업의 과정에서 5·6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민자당이라는 당명을 바꾸고 완전히 다시 창당하자는 주장이 우세해졌다. 그에 따라 민자당은 1996년 2월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어 재창당하였다.
당명을 바꾸고 당분위기를 쇄신하여 5·6공의 잔존세력과 민주계의 합작정당을 벗어나 김영삼 1인이 지배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한 신한국당은 1996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에 입각하여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각 도의 출신들이 모여 사는 수도권이 총선의 승패를 좌우할 관건적 지역으로 부상되었다.
대통령으로 신한국당 총재를 겸하고 있던 김영삼은 장차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야망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수도권 유권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회창(李會昌)과 박찬종(朴燦鍾)을 당고문으로 영입하여 수도권에서의 득표활동에 동원하였다.
신한국당은 이회창·박찬종의 활동에 힘입어 수도권에서 선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재적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김영삼은 무소속 및 야당의원들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는 공작을 전개하여 신한국당의 의석수를 재적 과반수로 끌어 올렸다.
선거에서 패배한 결과를 정치공작을 통해 뒤엎는 이러한 김영삼의 조치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여론이 고조되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김영삼의 대통령 자질부족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 지도력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김영삼의 정치적 지도력 약화는 신한국당 내부의 대통령후보 희망자들간의 경쟁을 격화시켰다.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희망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의 불법적 국정개입 및 한보철강 부정대출사건 개입의혹이 정치쟁점화 되어 김영삼은 국정지도 불능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김영삼은 1997년 2월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 희망자들 가운데 대중적 지지도가 가장 높은 이회창을 당대표로 임명하여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회창의 당대표 기용으로 정치위기가 다소 수습되면서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쟁이 본격화되었고, 김영삼을 추종하는 민주계는 반 이회창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회창은 1997년 7월의 전당대회에서 민정계의 지지로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이회창은 뒤이어 당총재로 추대되었고 김영삼은 명예총재가 되었다.
이회창의 대통령후보 피선과 당총재직 장악으로 안정된 모습을 찾아가던 신한국당은 이회창의 두 아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이회창의 인기가 급락하면서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김영삼을 추종하는 민주계는 이회창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며 이회창에 협조하지 않았다.
김영삼정부의 검찰은 야당후보 김대중(金大中)의 대선자금 의혹을 수사해달라는 이회창의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김대중을 이롭게 하였다. 이러한 민주계의 행동과 검찰의 조치는 자기를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김영삼의 지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 이회창은 김영삼에게 신한국당에서 탈당하라고 요구하였다.
김영삼은 민주계의 지원을 받아 이회창의 요구를 묵살하였으며, 김영삼·김현철과 가까운 사이인 이인제(李仁濟)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민주계의 상당수가 이인제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회창은 자신의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11월 초 민주당 대통령후보 겸 총재인 조순(趙淳)과 접촉,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할 것과 합당 후 대통령후보는 이회창이 맡고 당총재는 조순이 맡을 것에 합의하였다. 양인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1월 하순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합당대회를 개최하여 한나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였다. 이로써 신한국당은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