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1945년 11월 25일 북조선임시위원회 제3차 확대위원회에서 북한주민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기 위한 사상혁명으로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했다. 김일성의 제의에 따라 1946년 12월 3일 북조선노동당 상무위원회는 ‘사상의식 개변을 위한 투쟁을 전개할 데 관하여’ 라는 결정을 채택,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노동당과 임시인민위원회의 지도에 따라 북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농민동맹, 북조선 문학예술동맹 등 각종 단체들이 동원되어 전국적으로 모든 직장과 마을에서 건국사상동원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그에 따라 이 운동은 전체 주민이 동원된 군중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서는 개인 이기주의, 부화하고 나태한 경향, 관료주의, 사업에서의 무책임성과 고용자적 근성 등이 비판되었고, 새로운 국가 주인으로서의 의식, 조국 건설에 나서는 모든 난관과 시련을 뚫고 나가는 투지 제고,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며 모두가 서로 돕고 단결하는 윤리의식의 확립 등이 강조되었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서 북한의 각종 선전기관들은 사회와 집단, 조국과 인민, 당과 혁명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인간으로서 진정한 삶의 가치가 실현된다고 반복해서 선전했다.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북한에 도입될 사회주의체제에 부합한 집단주의적 사고를 가질 것과 그러한 집단적 사고에 입각하여 행동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북한 통치세력은 이러한 사상개조운동을 전개하면서 노동당과 그 주변 단체들의 조직을 강화하고, 북한의 인민민주주의국가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적발·숙청하여 북한정권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와 아울러, 북한 통치세력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북한의 당면한 경제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주민들의 노동력 동원으로 활용했다.
김일성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통하여 주민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노동규율을 강화하고 노동생산능률을 높이며, 원가를 낮추고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대중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건국사상동원이라는 명분하에 농민들의 애국미헌납운동과 농업생산증강운동, 탄광노동자들의 석탄증산운동, 공장노동자들의 증산운동 등이 전국적으로 유도되었다. 청년학생들도 ‘애국노동운동’을 전개하도록 유도되었으며, 기업가, 상인들도 각종 형태의 애국헌납운동을 전개하도록 유도되었다.
북한의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6·25전쟁 발발 직후까지 계속되었으며, 6·25전쟁 휴전 후에는 ‘천리마운동’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