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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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김대중(金大中)의 신민당과 이기택(李基澤)의 민주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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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92년 9월 김대중(金大中)의 신민당과 이기택(李基澤)의 민주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정당.
연원 및 변천

1987년 대통령선거 직전 김대중의 대통령후보 출마를 위해 창당된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 약칭 평민당)은 호남지역에만 기반을 둔 지역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려면 평민당의 지역적 한계성을 탈피해야 한다고 판단, 영남지역에 지지기반을 둔 소 야당인 민주당과 통합하기를 희망하였다.

한편, 1990년 1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할 때, 3당합당에 참여하는 당총재 김영삼(金泳三)에 반기를 들고 민주당에 잔류하였던 인사들이 창당한 민주당은 당총재인 이기택의 지도력 결여, 지속적인 당내분 등으로 인해 당세가 위축되었다.

민주당의 주요 간부들은 평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당의 활로를 찾기를 주장하였다. 평민당과 민주당은 1990년 7월 평민당과 민주당 및 재야세력 3자가 통합하여 하나의 강력한 야당을 만들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가운데 재야세력이 두 개의 계파로 분열되어 한 계파는 평민당과 결합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다른 계파는 민주당과 결합하였다.

신민당과 민주당은 1991년 3월에 실시된 기초지방자치단체 의회의원선거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패배의 최대 원인은 야당의 분열이었다. 지방선거 패배 후 신민당과 민주당은 야당분열로 인해 두 당이 함께 망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합당을 추진하였다.

두 당은 1991년 9월 민주당이라는 당명으로 합당하고, 김대중과 이기택은 당의 공동대표가 되었으며, 당직도 당세가 강한 신민당측의 양보로 비교적 균형있게 안배되었다.

1992년 3월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통합의 덕을 보아 민주당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기택 계열은 그들의 지지기반인 영남지역에서 크게 패배하여, 당내의 위상이 더욱 약화되었다.

김대중 계열은 1992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영남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지지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기택 계열을 우대하면서 당의 단합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영남지역에서 극히 빈약한 지지표를 얻어 패배하였다.

김대중은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체제로 운영되어 오던 민주당은 이기택 단일대표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민주당은 1993년 3월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이기택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아울러 8명의 최고위원을 선출, 당을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기택은 김대중 계열의 지원으로 당의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민주당의 주된 지지기반이 호남지역이고 최고위원 8명 중 6명이 호남 출신 인사들인 탓으로 해서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민주당은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의 원격조종에 따라 1993년 여름 199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창당된 이종찬(李鍾贊)의 새한국당과 재야의 한 집단인 김근태(金槿泰)의 통일시대국민회의를 흡수하여 당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탓으로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의 독주적 국정운영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였다.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던 김대중은 1994년 말부터 정계복귀의도를 나타내면서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의 대통령선거에는 자기가 야당후보로 입후보할 야망을 가지고 있던 이기택은 이러한 김대중의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는 1995년 초 김대중의 민주당에 대한 간섭이 지속될 경우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위협, 김대중의 정계복귀노력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1995년의 지방선거에서 민주당후보를 위한 지원유세를 하면서 사실상 정계에 복귀하였다. 지방선거결과는 야당의 승리였고, 그 성공을 배경으로 김대중은 다시 야당의 지도자로 복귀하려고 하였다.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민주당의 당권을 내놓도록 압력을 가하였으나 이기택이 그에 완강히 반발하였다.

김대중은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1995년 7월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선언하였다. 민주당의 다수세력인 호남 출신 당원들과 기타 김대중추종자들은 민주당을 탈당하여 김대중이 새로 창당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였다.

민주당 잔류파는 이기택 계열과 반이기택 계열로 분열되어 내분을 겪었다. 민주당 잔류세력은 1995년 8월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박일(朴一)과 홍영기(洪英基)를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민주당은 정치신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창당된 야당인 개혁신당과 합당교섭을 전개하여 1995년 말에 양당이 합당되고, 이기택은 고문, 김원기(金元基)와 장을병(張乙炳)은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고문 이기택, 공동대표 김원기가 낙선하는 등 크게 패배,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불가능한 소 정당으로 전락하였다. 민주당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야망을 가지고 있는 서울시장 조순(趙淳)을 영입하여 당의 활로를 모색하기로 하고, 1997년 8월 전당대회를 개최, 조순을 당총재로 추대하였다.

뒤이어 9월에 다시 전당대회를 개최, 조순을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였다. 민주당의 총재 겸 대통령후보가 된 조순은 자신의 지지도가 상승하지 않자 신한국당후보 이회창(李會昌)측과의 연대를 추진하였으며, 이회창과 조순은 양당을 합당하기로 합의하였다.

1997년 11월 하순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한나라당이라는 새로운 당명을 가진 정당을 창당하고, 이회창과 조순을 새당의 대통령후보와 총재로 선출하였다. 민주당의 정치인들 중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입당함으로써 민주당은 결국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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