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현 ()

정치
인물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민주화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53년 6월 19일
사망 연도
1982년 10월 12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광
내용 요약

박관현은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민주화운동가이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였으며,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화 성회'를 이끌었다. 1982년 10월 광주교도소에서 재소자 처우 개선과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하다가 사망하였다.

정의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민주화운동가.
인적 사항

박관현(朴寬賢)은 1953년 6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서 태어났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광주동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군대를 다녀온 뒤인 1978년에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주요 활동

박관현은 전남대에서 광주고 동창생이던 양강섭 · 장석웅 등과 만나 사회과학 관련 공부 모임에도 참여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 약칭 민청학련) 선배들인 윤한봉과 김상윤을 소개받았다.

1978년 12월 들불야학 성원들과 함께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을 꾸려 두 달여 동안 노동자들의 실태조사를 진행하였다. 총 299장의 설문조사가 이루어진 가운데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에 대한 기초 조사가 이루어졌다. 1979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실태조사반’ 활동을 함께 하였던 장석웅 · 박관현 · 안진 · 신영일 등이 사회과학 동아리 모임인 ‘사회조사연구회’를 결성하였고, 박관현은 부회장을 맡았다. 그런데 며칠 뒤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이 박관현을 찾아와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렇게 박관현은 들불야학 강학이 되었다.

1979년 5월 3일 전남대학보(지금의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가 실렸다. 『전대신문』은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실태조사 결과를 보도할 예정이었으며, 5월 10일에 두 번째 편이 보도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과 동시에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있었다. 다음 해 전국 각지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화의 봄(이른바 서울의 봄)’이 도래하였다. 전남대에서도 복적생들을 중심으로 ‘어용(御用) 교수 퇴진’ 운동이 전개되어 3월 27일에는 어용 교수 백서가 발표되었다.

또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선거 시행세칙 제정 및 중앙선거관리위원 선출을 마쳤다. 박관현은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를 결심하고 공과대학 이승룡, 고등학교 동문인 양강섭 등과 함께 선거 출마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4월 9일 치러진 총학생회 선거에서 박관현은 60%가 넘는 지지를 받으며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출범 직후부터 학내외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는데, 박관현은 그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 5월 14일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 지역 학생들이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민족 · 민주화 성회’를 열었다. 이날 전남대는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가두 행진과 집회에 참석하였다. 다음 날에도 가두시위와 전남도청 앞 집회가 계속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계기로 다른 지역 학생들의 시위가 잠잠해진 것과는 달리 5월 16일 광주 지역 대학생들과 시민, 그리고 고등학생들도 참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이날 저녁에는 횃불 시위도 이루어졌으며,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돌아온 대열은 ‘5 · 16 화형식’을 진행한 뒤 집회를 평화롭게 마쳤다.

정부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김대중(金大中)을 비롯한 민주 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예비검속을 진행하였다. 당시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전국대학총학생회 대표단 회의장에 군인들이 진입하여 전국 55개 대학 95명의 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이 소식은 전국 각지의 총학생회에 통보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에도 소식이 전달되어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총학생회 집행부가 피신하였다.

5 · 18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피신하였던 박관현은 6월 초순 서울로 도피처를 옮겼고, 1981년 9월까지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 자리한 이모 집 다락방에 숨어 살았다.

박관현은 1981년 9월 서울의 ‘화랑섬유’ 공장에 취업하였고, 다음 해 4월 5일 수배자인 것이 발각되어 공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 5월 4일 박관현은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령 위반’ 등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9월 7일 1심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8월부터 교도소 내에서 재소자 처우 개선과 5 · 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하였고, 10월 10일 쓰러져 전남대병원으로 옮겼으나 10월 12일 새벽 사망하였다. 경찰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부검을 실시한 후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으로 보냈고, 1987년 망월동 구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광주광역시 국립5 · 18민주묘지 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최정기 외,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와 박관현』(선인, 2020)
최유정, 『새벽기관차 박관현 평전』(사계절, 2012)

인터넷 자료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박관현(https://deulbul.org/archives/db_7/%eb%b0%95%ea%b4%80%ed%9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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