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尹漢琫)은 1948년 2월 1일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675번지에서 아버지 윤옥현과 어머니 김병순의 4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강진칠량국민학교,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하였다. 2007년 6월 27일 폐기종 투병 중 폐 이식 수술 후 61세로 사망하였다.
1971년 12월 30일 전남대학교에서 교련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무기정학을 당하고, 1973년 전남대학교 ‘민족사연구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74년 4월 9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전남북 책임자로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75년 2월 16일 형 집행정지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1975년 4월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 4월 '부활절 예배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1977년 12월 9일 대구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였다.
1978년 '함평고구마사건'이 발생하자 단식투쟁을 하는 등 지원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해 12월 송백회를 결성하여 양심수들의 옥바라지를 지원하였다. 1979년 6월 4일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현대문화연구소는 김상윤의 녹두서점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10월 16일 부산에서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이 발생하자 광주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어 물고문을 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한 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10 · 26사태 이후 같은 해 12월 9일 정부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함으로써 석방되었다.
1980년 1월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를 ‘전남민주청년협의회’로 전환하여 책임자로 활동하며 극단 ‘광대’의 창립과 운영을 돕는 등 문화운동을 후원하였다. 같은 해 5월 15일 민중항쟁 발발을 예견하고 산중 모임에서 도청 장악 투쟁을 역설하였다.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예비검속자 명단에 포함되어 수배되었다. 이후 5월 27일 광주항쟁의 주동 인물(내란음모죄)로 현상 수배되어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1981년 4월 29일 표범호에 승선하여 미국으로 밀항하여 6월 3일 미국 시에틀에 도착하였다. 1981년 6월 12일 김일민이란 가명으로 시애틀 동양식품점에서 일하며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였으나, 미국 정부에 의해 망명이 계속 보류되었다. 1981년 10월 10일 미국 내에서 노동허가서를 발급받은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였다.
1982년 6월 ‘광주수난자돕기회’를 결성하여 1988년 6월 해체할 때까지 3만 달러 이상을 광주로 송금하였다. 1982년 10월에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의 옥사에 항의하며 10일간 단식 농성을 전개하였다. 1983년 2월 5일 로스앤젤레스에 ‘민족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5월 로스앤젤레스 프레스클럽에서 5 · 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과 밀항 탈출 과정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984년 1월 1일 미국에서 ‘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결성하였다. 이후 ‘한청련’은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 · 시에틀 · 시카고 · 덴버 · 댈러스 · 뉴잉글랜드 · 뉴욕 · 필라델피아 · 워싱턴 D.C. 등 10개 지역에 지부를 결성하고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 유럽 등지에도 지부를 결성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5년 11월 뉴욕문화패 ‘비나리’를 결성하고 이후 로스앤젤레스 ‘한누리’, 시카고 ‘일과 놀이’, 산호세 ‘새누리’ 등으로 확대해 갔다. 1987년 4월 17일 미국 정부로부터 정치적 망명 허가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을 결성하였다. 1988년 5월 한청련과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을 주축으로 ‘핵무기 철거 요청 10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하여 이듬해 7월까지 11만 명의 서명을 받아 미국 의회에 전달하였다.
1989년 7월 20일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7일에 걸쳐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하였다. 1990년 10월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 유럽 · 미주 한청련이 결합하는 해외 한청련을 결성하였다. 1990년 10월 1일 유엔본부 앞에서 남북의 유엔 분리 가입 저지와 평화협정 체결 촉구를 위한 15일간의 단식 농성을 벌였다. 1991년 9월 문화선전대 ‘해방의 소리’의 유럽 · 호주 · 미주 순회공연을 전개하였다.
1993년 5월 19일 일시 귀국하였다가 8월 18일 영구 귀국하였다. 1994년 8월 5 · 18기념재단 창립을 주도하였다. 1994년 11월 민들레소극장 확장 이전 추진위원장을 지냈다. 1995년 3월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95년 5 · 18특별법 제정과 학살자 처벌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같은 해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의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1996년 1월 ‘김용근선생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1997년 12월 5‧18민주화운동 당시 5월 27일 최후 항전과 고문을 겪으며 투병하던 김영철의 투병 생활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2000년 7월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2001년 6월 28일 ‘들불열사기념 사업회’를 결성하고 다음해 5월 들불 7열사(박기순‧ 윤상원‧박용준‧ 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4년 6월 5 · 18기념재단이 주최하는 ‘5 · 18아카데미’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 『운동화와 똥가방: 5 · 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미국 정치망명기』(한마당, 1996), 『망명: 윤한봉 회고록』(한마당, 2009) 등이 있다.
2007년 6월 30일 국립5 · 18민주묘지(1묘역 6-12)에 안장되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