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尹祥源)은 1950년 8월 19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천동마을(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개원(尹開源)이었으나,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시절에 개명하였다.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병역을 마친 뒤 1975년에 복학하였다.
윤상원은 복학한 뒤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事件) 당시 전남대학교 책임자이던 김상윤을 소개받아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78년 2월 전남대학교를 졸업한 뒤 주택은행에 취업하였다. 같은 해 7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수배를 받던 전남대 후배 박몽구와 조봉훈이 찾아와 한동안 윤상원의 집에 머물렀으며, 8월에 윤상원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주택은행에 사직서를 내고 광주로 내려왔다.
김상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에 드나들던 윤상원은 광주시 광천동 광주공단에 있는 한남플라스틱에 취업하여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며 동시에 들불야학 강사(일반 사회)로 활동하였다. 1978년 12월 들불야학 성원들과 함께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반’을 만들어 두 달여 동안 노동자들의 실태조사를 진행하였다. 총 299장의 설문조사가 이루어진 가운데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에 대한 기초 조사가 이루어졌다. 들불야학 강학(講學) 윤상원은 박관현을 찾아가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해줄 것을 제안하고 이를 박관현이 수락함으로써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 5월 3일, 『전남대학보』(지금의 『전대신문』)에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가 실렸다. 『전남대학보』는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실태조사 결과를 보도할 예정이었으며, 5월 10일에 두 번째 편이 보도되고 더이상 보도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24일에 들불야학에서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공연하였으며, 이날 행사가 끝난 뒤 윤상원을 들불야학으로 참여하게 한 박기순이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하였다. 윤상원은 박기순의 죽음에 대해 일기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 두 볼에 흐르는 장밋빛 볼 서럽디 서럽도록 아름답고 난 몰라라 무엇이 그대의 죽음을 말하는가를 아무리 쳐다봐도 너는 살아 있었다. 죽을 수 없었다.”라며 슬퍼하였다.
1980년 4월 30일 경기도 인천에서 진행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식에서 윤상원은 광주 전남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함에 따라 조성된 ‘민주화의 봄’ 식에 들불야학 강학이던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광주 시민들의 항의 시위를 공수부대가 폭력 진압함으로써 5 · 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민들의 항의 시위와 저항이 계속되자 윤상원은 들불야학 성원들과 함께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윤상원은 녹두서점과 들불야학, YWCA 등지에서 들불야학 구성원, 놀이패 광대 성원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비롯한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5 · 18민주화운동 기간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시민이 희생되고 시민들이 무장 저항하게 되자 윤상원은 청년들을 규합하고 선전물을 만드는 등 항쟁을 계속하였다. 당시 군의 계속된 겁박(무조건적인 무기 반납)과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온건한 입장에 반대하며 윤상원은 청년들을 규합하여 5월 25일에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전란남도 도청으로 진입하였다.
윤상원은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을 맡아 기자회견을 통해 항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한편, 시민군을 재편하여 최후 항전에 대비하였다. 5월 26일 국내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피해 상황을 전하였으며, 당시 기자회견을 본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그의 눈빛이 그저 인상적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군의 최후 진압을 앞두고 전남도청에 있던 청소년과 여성 등을 밖으로 내보내며 윤상원은, “여러분, 드디어 전두환 살인 집단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그동안 우리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전남도청, YWCA, YMCA, 전일빌딩 등지에 시민군을 재배치하였다. 전남도청 민원실 2층에서 계엄군의 진입에 대비하던 윤상원은 이날 새벽 4시경 무력 진압해 온 공수부대 특공조 대원들에게 맞서다 총상과 화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1982년 2월 20일 들불야학 후배이던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는데, 이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린 노래가 「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국립5 · 18민주묘지(1묘역 2-11)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