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연합하여 김대중 후보로 단일화하며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하였다.
김대중은 일찍부터 김종필과 연대의 필요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1985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한정된 목적을 위해서는 김종필 씨도 동참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라면서 김종필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으로 신한국당이 창당됨으로써 김종필과의 연대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을 추진키로 합의한 신한국당 내부에서 이견과 대립으로 인해 김종필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이 창당한 자민련이 제3당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문민정부의 실정에 따른 국민들의 불신 등이 만연한 상태에서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 선출에 불복한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하였다. 또 제14대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과의 연대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였다.
김종필과의 연대 구상은 1995년 10월 1일 동아시아포럼에서 제기된 지역 연합론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처음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계 복귀를 대비하던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연합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996년 4월 총선거에서 예상보다 패배한 결과로 인해 다시 김종필과의 연대 협상이 진척되었다.
국민회의 내부에서는 자민련과의 협상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김대중은 ‘색깔론 망령’과 3당 합당 이후 강화된 호남 고립 구도의 타파 등을 내세우며 “소신과 명분 못지않게 현실적 선택도 중요하다."며 비판을 설득하며 ‘정권 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저항적 지역주의 연합’과 수평적 정권 교체의 정당성을 근거로 자민련과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와 자민련의 김용환 부총재를 대표로 한 실무 협상이 진행되어 초안을 완성한 뒤 10월 27일 김대중이 김종필의 청구동 자택을 방문한 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단일화하고 집권 시 실질적인 각료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갖는 실세 총리는 자민련 측에서 맡도록 한다.”와 “임기 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에 합의함으로써 디제이피연합이 이루어졌다.
1997년 11월 3일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 후보로 추대되며 자유민주연합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디제이피연합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전 포항제철 회장 박태준이 새로 합류함으로써 디제이피연합이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40.3%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 김종필이 초대 총리에 임명됨으로써 한동안 연립 정부가 지속되었다.